date: 2012.05.01~2012.05.31 Write: infic 여신님들 출처:http://cafe.daum.net/INFINITE.Fanfic 장르 : 학원물 이 글은 다음 인피니트(INFINITE)팬픽카페INFIC 주제릴렐 게시판에서 연재되었던 5월 주제 릴레이 입니다. 무단 도용 및 커플링 변경 금지. 출처 밝힌 후 공유는 가능 합니다.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고막이 울릴 정도로 정도로 정신없이 울어대는 매미들의 울음 소리를 보아하니 이제 온연한 여름 날씨였다. 아스팔트 도로에서 피어나는 열기는 신발을 신었음에도 발 밑이 뜨거워지는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손부채질을 하며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학교에 도착한 성종은 교실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발을 들이자마자 코 끝을 자극하는 쾌쾌한 담배 냄새에 성종의 미간이 구겨졌다. 성종의 시선이 교실안을 가득 매운 뿌연 담배 연기를 따라 창가쪽에서 멈추어졌다. 난간에 걸쳐 앉아 담배를 피워대고 있는 우현을 보며 성종은 기가 차다는 표정이였다. 이른 아침부터 교실안에서 배짱 좋게 담배를 피워 대고 있는 우현은 학교에서 소위 일진으로 불리우고 있었다. 성종을 발견한 우현이 성종을 향해 손을 까닥거리자 잠시 머뭇거리던 성종은 가방끈을 쥐여매고 우현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현과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선 성종의 시선이 우현에게 향하지 못한채 이리저리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런 성종의 모습을 보며 픽, 웃음을 터뜨린 우현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한 모금 들이 마시고 성종의 얼굴에 연기를 내뿜었다. 뿌연 연기가 제 시야를 가려옴과 동시에 코로 들어오는 담배 연기에 성종이 괴로운듯 인상을 찌푸리며 콜록,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담뱃재를 털어내고 한 모금 더 들이 마신 우현이 다 피운 담배 꽁초를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그와 동시에 난간에 걸쳐 앉아 있던 우현이 몸을 움직여 성종에게로 밀착했다. 이른 시간이라 교실에는 둘 말고는 아무도 없었지만 사람이 꽉 찬 듯한 열기에 성종의 등뒤에서는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우현이 성종을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고 성종은 그런 우현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 이성종 너 남자 좋아하냐? " 성종의 걸음이 멈춰섰다. 우현의 입에서 나온 말에 성종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당황한 성종이 안절부절 못하며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뭐, 뭐래? 야, 너 낮술했어?" 새가슴을 쥐어짜 애써 배짱좋게 대꾸하니 우현이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하고 웃었다. 그 모습에 되려 성종의 기가 더 죽어버렸다. 우현의 얼굴이 점점 더 성종에게로 가까워졌다. 그럴수록 성종은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뒤는 벽이었다. 머지않아 성종은 벽에 막혀 본의 아니게 뒷걸음질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뛴다. 가방끈을 쥔 손에서는 자꾸만 식은땀이 나왔다. 이내 우현이 기나긴 침묵을 깨버렸다. "병신아, 나한테서 지금 술 냄새나냐? 담배 냄새나지." "……." "왜, 찔려? 이 일진새끼가 내 성향을 어떻게 알았나 싶나?" 우현이 자꾸만 제 신경을 살살 건든다. 화가 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우현에게 대들어봤자 좋을 게 하나 없다는 것을 이미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충분히 깨달은 성종이었다. 성종은 그저 가방끈만 더 꽉 쥔 채로 화를 꾹꾹 눌러담을 수밖에 없었다. 성종이 아무런 대꾸도 안 하자 우현은 짜증난다는 듯이 혀를 차고는 바로 성종의 어깨를 잡아 더욱더 벽에 밀어붙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성종의 등이 벽에 아프도록 부딪쳤다. "아!!" "성대에 이상 생겼냐? 왜 말을 안해? 나 혼자 주절주절 떠드는 취미 없거든?" 살짝 미소를 띈 얼굴이 광기어린 것처럼 보였다. 악마다, 저게 악마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성종은 주먹을 꽉 쥐면서 부르르 떨었다. 반짝이는 두 눈이 저를 향해 노기를 띄자 우현은 히죽히죽 웃었다. 미친년, 꼭 할말 없으면 이렇게 째려만 보더라. 그리고 마침내, 성종이 계속 유지하던 침묵을 깨어냈다. "…헛소리 지껄이지마." "뭐?" "헛소리 지껄어지 말라고, 내가 이렇게 생겼다고 해서 그런 성향으로 보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악!!!" 쾅, 하는 요란한 소리가 교실 안을 울렸다. 성종의 교복 소매를 잡아당긴 우현은 그대로 성종을 책상 위로 넘어뜨렸고, 성종은 그대로 책상과 함께 교실 바닥에 엎어졌다. 책상에 세게 부딪친 어깨를 잡으면서 일어나려는데 우현이 그대로 성종의 어깨를 발로 밟아 짓눌러 일어나지 못하게 막았다. 성종은 도로 바닥에 엎어져 신음했다. "으읏…!!" "헛소리? 개년아, 내가 본게 있는데 이년이 지금 뭐라는 거야?" "…하읏, 뭐?" "이야, 나도 내 눈을 믿을 수가 없더라고. 응?"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엄습해오는 불안감이 성종을 덮쳤다. 설마, 설마…!! "뭐? 형 아니면 안돼? 나도 너 아니면 안돼? 씨발, 게이인 것도 토나와 죽겠는데… 게다가 근친?" "…너, 너…!!" 우현의 말에 성종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어버렸다. 어쩐지, 누군가가 보고 있던 것 같더라니… 그게 하필 남우현이었을 줄이야. "이성열, 이성종. 참 눈물겨운 형제애야. 응?" 우현이 씩 웃는 모습에 성종은 기어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형, 나 어떻게 해? * * * 하필이면 오늘 교문이 이 미친놈세트일 줄이야. 2학년 학생회장 김명수, 미친개 주제에 음악선생인 김성규. 최악의 조합이라고 생각하며 성열은 열심히 오리걸음으로 운동장을 돌고있었다. 명찰 하루 깜빡했을 뿐이었고, 39초 늦은 등교였을 뿐이었다. 만약 전교 1등 김명수가 늦었어도 이랬을까 싶은 억울한 마음에 (물론 저새끼는 절대 그럴 위인이 아니지만.) 전교 (뒤에서2등) 은 마음으로 울 뿐이었다. 망할. 오늘따라 햇빛이 겁나 뜨거운 것 같았다. 이러다 이 나약한 몸뚱이가 백골이 모래알이 되어 학교 운동장에 말라비틀어지면 "…이성열, 이래가지고 제 시간에 수업 들어가겠냐?" 모른척 할 인간들이지. 암, 그렇고말고.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김명수의 목소리에 성규가 팔을 휘적휘적 저어대며 그러라 해보였다. 화요일은 교무회의도 없냐 망할. 하고 중얼 거리는 소리를 귀신같이 들었는지 딱딱한 판때기가 머리를 후려쳤다. 교육청에 고소할거야?!라고 하고 싶었지만, 웬지 김성규는 교육청도 이겨먹을 인간일지도. 옆에서 조용히 오리걸음을 걷고 있는 이호원의 표정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야, 남우현은?" "……." "말 좀 해. 이 등신아." "이성열. 아가리 싸잡아 매고 속도 올린다. 실시." 김성규의 목소리 하나에 있는 힘껏 스퍼트를 올릴 수 있는 난 군대 생활은 존나 잘 할 것 같아. 종아리가 터질 것 같아서 후들후들 호원을 붙들고 늘어졌다. 야, 나 죽을 것 같애. 휙- 무심하게도 앞서 나가버리는 개같은 친구의 등에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주었다. 엿 먹 으 세 요. 언젠가 내가 별 다섯 개짜리 호텔의 쉐프가 되는 날, 너 따위에게. "…뭐하냐." "빵…먹을래?" …빵을 사다 바칠 날이 없었으면 좋겠다. 호원아. 아, 날씨 좋다- 하고 책상 위에 퍼졌다. 날 지각하게 만든- 잠 한 숨 못자게 만든 망할 동생놈은… 잘, 등교 했겠지? [“형도 너 아니면 안돼.”] [“…….”] [“……그렇지만, 이건 아니야. 성종아. 우린 아니야.” ] 아, 짜증나. 뒷 머리를 벅벅 긁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와르륵 쏟아내던 녀석의 모습이 아무리 아프고 속상해도 아닌 건, 아닌 거다. 그렇게 말해줘야 한다. 그게 맞으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여전히 사이좋은 형제로, 녀석과 지내는 게. 그리고 그 마음을 확실히 잘라주는 게 형으로써 내가 할 일인 거겠지. [ "…아아, 아침 방송입니다. 여러분 모두 굿-모오닝!" ] 3학년 주제에 당당하게도 여전히 마이크를 놓지 못하는 방송 중독자 장동우의 아침 방송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다시 짖어보게 제군."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선생님." 참으로 딱 뿌러지게 잘도 짖는 학생회장님을 보며 성규는 어이가 없었다. 규칙은 칼 같은 녀석이 미치는 것도 확실한 학생회장님 김명수덕에 성규는 말을 잃었다. 뭐래?! "요새 날씨가 미쳤다고 학생 회장도 같이 미쳤나?" 찡긋거리는 성규의 눈썹을 따라 명수의 시선이 움직였다. 성규는 대답이 없는 명수에 어? 하고 대답을 재촉하였다. 명수는 성규의 눈썹을 따르던 시선을 늘어뜨려 성규의 눈을 마주했다. "음악을 가르치시는 분이 제자의 애정을 외면하셔도 됩니까?" "음악? 제자의 애정? 외면?" 성규는 대체 그것들의 상관관계를 알 수가 없어 황당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성규의 표정은 잔뜩 헤집어진 것에 반해 명수는 단정하고, 반듯하였다. 성규는 손에 들려있던 학생부 일지로 부채질을 하였다. "선생님, 좋아합니다." 성규는 눈을 지르감았다. 그리고는 몇 번을 더 부채질을 하다 눈을 떴다. "미쳐도 곱게 미치든가 해라. 엉?" 성규는 명수가 헤집어놓은 표정을 도저히 수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감추려 인상을 팍 찌푸렸다. 성규는 찌푸린 인상을 풀지 않은 채 학생부실의 문을 열려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손은 목적지인 문고리에 닿기도 전에 명수의 손에 의해 제지당했다. 성규는 이제 진심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명수의 손을 확 떨쳐낸 성규가 문고리를 잡고서 명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학생회장이라고, 전교 1등이라고 선생님들이 다들 예뻐해주시니까 그렇게 건방진가?" 잔뜩 비꼬는 성규의 말에도 명수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를 비추지 않았다. 성규는 문고리를 밀어 젖혀 학생부실의 문을 열었다. "학생이 넘지 말아야 할 선. 충분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너를 너무 과대평가 했었나보네." 성규는 저를 잔뜩이나 헤집어트린 명수의 감정에서 빠져나왔다. 평정심을 되찾은 성규의 얼굴 위로는 무표정만이 그려졌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학생부실의 문이 닫혔다. 명수는 닫힌 학생부실 나무 문의 무늬만 눈으로 훑다가 뒤돌아섰다.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던 명수의 얼굴에 짧게 웃음이라는 것이 보였다 사라졌다. 저는 일부러 그 선에서 왔다 갔다하면서 선생님을 도발한 거였는데 말이죠. 명수는 뻐근한 목을 가볍게 돌리며 계단을 올랐다. * * * 호원은 복도 벽에 등을 기대어 쪼그려 앉아서 열심히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닥 게임 성적은 좋지가 못했다. 호원의 정신이 딴 곳으로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핸드폰 화면 한 번, 방송실이라는 팻말이 달린 문짝 한 번. 호원은 그 동작을 수도 없이 반복하다 핸드폰을 교복 바지 주머니로 쑥 밀어 넣어버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올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왜 나오지를 않아. 안 그래도 짙은 호원의 인상이 짜증이 섞여들며 더욱 짙어져갔다. 벽을 툭툭 차대던 호원은 드르륵하는 문소리에 바닥으로 툭 던져 놓았던 백팩을 잽싸게 잡아들었다. "호야! 오늘은 조금 늦었지? 미안." "뭐, 괜찮아요." 어쩌면 괴상할 웃음소리를 내며 동우가 환하게 웃었다. 그에 호원도 입꼬리를 올려 함께 웃고는 동우의 손을 잡았다. 뭐, 웃음소리 쯤 이상하면 어때. 내 눈에만 좋아보이면 장땡인거지. * * * 우현은 본래 성열, 호원, 명수와 동갑내기였으나 1년을 꿇은 탓에 현재 성종과 같은 학년이었다. 그래서인지 같은 반 아이들은 일진인데다 저들보다 나이까지 많은 우현을 거의 깍듯하게 대하다시피 했고 우현은 그들 위에 왕처럼 군림했다. 하지만 성종은 저를 그렇게 대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순종하는 것 같으면서도 세세히 뜯어보면 결코 굽히지 않는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더 관심을 끌고 싶었다. 그런데… 그 장면을 봐버린 것이다. 하, 진짜 엿 같네. 성종은 지금 제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깐 좀 너무 험하게 다뤘나? 괜히 신경이 쓰여서 머리를 긁적이던 우현은 이내 종례가 끝나자마자 가방을 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원래 야자는 꼭 해야 했지만 지금 교사가 나간 이 교실에서 우현을 막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우현은 그대로 가방을 들쳐메고 가려다가 성종의 자리 근처에서 우뚝, 하고 멈춰섰다. 성종은 여전히 제 쪽을 쳐다도 보지 않고 교과서만 뚫어져라 쳐다본다. 씨발, 이게 진짜…. "야, 이성종." "……," "사람이 불렀으면 대답을 해." "…왜." 대답은 했지만 절대 쳐다보려고는 하지 않는다. 하, 아직도 나한테 내세울 자존심이란 게 있긴 있었나? 우현은 성종의 책상 위로 제 발을 올려놓았다. 교과서의 끄트머리 부분이 우현의 발에 밟히게 되자 성종의 인상이 대번에 찌그러졌다. 우현은 발을 비벼 밟고 있는 면적을 좀 더 넓혔다. 그제서야 성종이 고개를 들어 우현을 쳐다봤다. 아니, 어쩌면 째려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니가 지금 나한테 이런 식으로 뻣뻣하게 굴 때가 아닐텐데?" "……." "말로 할 때 순순히 따라 나오는 게 좋을 거다. 매장당하고 싶지 않으면." 으르렁대면서 협박을 한 우현은 이내 발을 거두고 교실 문을 거칠게 열면서 나갔고, 성종은 바들바들 떨면서 분을 삭히다가 이내 신경질적으로 교과서를 가방 안에 집어넣고 그대로 가방을 손에 든 채로 우현을 따라 나섰다. 어디로 갈 생각인 건지 우현의 걸음은 좀처럼 멈출줄을 몰랐다. 썅, 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이내 우현의 발길이 뚝, 하고 끊겼다. 멈춘 곳은 다름아닌 분식집 앞이었다. 허, 뭐야? 우현이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본 성종은 그대로 헛웃음을 터트렸고, 머지않아 우현이 도로 나와서 성종에게 오라는 손짓을 했다. "…뭐야?" "들어오라고." "너 지금 이게 뭐하자는 플레이야? 병 주고 약 줘?" 성종이 쏘아붙이자 우현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들어오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데리고 들어갈 기세다. 결국 성종은 짜증섞인 얼굴로 우현을 따라 분식집 안으로 발을 들였고, 이내 자리에 앉은 우현이 주문을 했다. "아줌마, 여기 떡볶이 2인분요!!" 남우현, 너 대체 무슨 속셈이야? * * * 학생 회실에 앉아 누리는 땡땡이는 생각보다 꽤 즐겁다. 타고난 머리 덕에 좋은 집에 입양 되고 좋은 성적도 갖게 돼 이런 여유까지 가지게 되니. 머리 좋은 게 그다지 나쁜 건 아니었다. 낳아주고 버려준 부모에게 그거 하나는 감사해야겠지. 2교시 수업이 한창 진행 될 때. 교무실에는 교무회의가 진행 중일테고, 이 시간에 학생회실에 들어설만한 인간은 없었으니까. 여유롭게 서랍을 열어 압수 물품 중 마음에 드는 종류의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김성규…. 그 선생은 조금은 서늘하게 느껴지는 멘솔을 닮았다. 담배임에도 연하고, 그리고 그 가볍고 싸한 향은 깊게 베이지도 않는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럼에도 결국엔 사람 죽이는 니코틴을 잔뜩 품고 있는 건 다른 담배와 다르지 않다. 나약한 모습을 하고 숨을 조이는 건 결국엔 같아. 당신이 나한테 그래. 어떤 남자와 키스하고 있는 김성규를 본 적이 있다. 그 때부터 굉장히 신경 쓰였다. 그러다보니 좋아졌다. 응, 그런 것 같았다. 누구를 보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던지라 굉장히 생소하고 조금은 당황스러워서 다짜고짜 일단 뱉었는데. 역시 판단 미스였나. 연애 따위, 알게 뭐야. 서랍장에 학생회 녀석들이 마구잡이로 쑤셔 넣어놓은 압수 서적 중 한권을 꺼내 들었다. [ 사랑하는 사람을 사로잡는 101가지 고백 이야기 ] 씨발, 어떤 골빈 새끼가 이런 걸 101가지나 만들어 놓은 건데? 직접 만든 케이크와, 편지와 꽃… 따위를 내밀었다간 김성규한테 맞아 죽을 게 뻔하고, '피아노 연주와 노래…' 됐다 음악 선생 앞에서 뭔 개망신을 당하라고? …방금까지 저자를 존나 비웃었던 주제에,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 열독하고 있는 스스로가 조금은 병신 같은 날이었다. * * * "형, 아까 형 기다리면서 게임을 했는데 게임이 너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속에서 짜증이 났는데 왜인지 알고 나니까 웃음 밖에 안 나오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였을까요?" "응? 왜 그랬는데?" 비밀이예요. 아이, 그런게 어딨어! 말해줘! 안돼요. 비밀. 호야아. 호원이 저를 보며 베시시 웃어보이는 동우의 모습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귀 끝이 뜨거운 걸 보니, 그새 붉게 물든 모양이었다. 제 옆에 앉은 동우는 손짓, 발짓을 해보이며 '오늘 아침 방송을 하며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호원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서렸다. 선배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귀엽나. 호원이 동우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웃음을 입밖으로 내뱉었다. 동우는 갑작스럽게 제 어깨에 올려진 손에 몸을 흠칫 떨었다. " 호야? " " 왜요? " 아, 아무것도 아니야! 동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아, 덥다. " 선배, 더워요? " " 으응. 조금 덥네. " 이상하다. 어제 비와서 오늘 날씨 쌀쌀한데…. 습기차서 그런가? 호야가 팔만 내려주면 안 더울 것 같은데…. 동우가 베시시 웃으며 손 부채질을 해댔다. * * * "안 먹어? 이 집 떡볶이 졸라 맛있는데." 너 같으면 코 앞에 날 아침에 괴롭힌 새끼가 있는데 먹을 게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어? 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지만 애써 꾹 참아낸 성종이다. 그에 반면 우현은 태연자약하게 떡볶이를 꾸역꾸역 잘도 먹어대고 있었다. 대체 내가 왜 이 일진자식을 따라와서 이 모양인지… 성종은 끝내 떡볶이를 하나도 먹지 않았다. 성종의 앞에 놓여진 젓가락이 깨끗한 것을 본 우현이 코웃음을 쳤다. 씨발, 지조 지킬 거 한번 더럽게 없다. "…다 먹었지? 설마 계산을 나한테 하라고 할 속셈이면 집어치우는게 좋을 거야. 난 억지로 끌려온 거니까." "야." "갈 거야."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것을 우현이 손목을 세게 잡아 가지 못하게 막았다. 참고 참았던 화가 또 다시 올라왔다. "너 대체 나한테 왜 이래?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어?!" "앉아." "놔!" "앉으라고, 사람들 다 보는데서 개망신당하고 싶지 않으면." …진짜, 끝까지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대체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걸까. 문득 성열이 보고 싶어졌다. 성종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면서 힘없이 제자리에 도로 앉았고, 우현은 혀를 차면서 성종을 따라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이내 성종이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훌쩍이자 우현이 욕을 읊조리면서 성종을 나무랐다. "미친, 왜 울어? 기집애같이…." "끄으, 흡, 흐으…!!" "…에이, 씨발." 입에서는 욕이 나왔지만 막상 저렇게 끅끅대며 우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아려왔다. 하지만 그동안 졸라게 괴롭힌 주제에 이제 와서 울지 말라며 위로할 자격같은 게 있을까. 괜히 짜증만 났다. 우현은 결국 제 진심 대신 또 다시 모진 말을 내뱉었다. "니가 울 자격이 있어? 더러운 게이자식…." "흐으, 말 함부로 하지 마 깡패새끼야…!!"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야, 넌 한 핏줄한테 이게 서? 어?" 우현은 비릿하게 웃으면서 테이블 밑으로 손을 뻗어 성종의 바지춤을 건드렸고, 갑작스레 느껴지는 자극에 성종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성종의 다리가 우현의 정강이 부근을 제대로 차버렸고 우현은 그대로 의자와 함께 뒤로 나자빠졌다. 성종은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우현을 노려봤다. "함부로 말하지마!! 네 그 얄팍한 주둥이에 올려질 만큼 하찮은 마음 아니니까!! 소문내든 말든 맘대로 해!!!" 그대로 성종이 나가자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우현에게로 쏠렸고,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제대로 한방 먹었다는 생각에 우현은 얼굴을 붉히면서 얼른 떡볶이 값만 서둘러 치른 뒤 그대로 나와버렸다. 씨발, 내가 뭐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하지만 왠지 하찮게 키워온 마음이 아니라는 말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소문낼 생각은 없다. 그저, 조금 겁을 주고자 했던 건데. 발걸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 * * 방송부 임원이었던 성열은 종례후, 아침부터 오리 걸음을 하느라 알이 배긴 다리를 이끌고 방송실로 향했다. 미친놈세트 2학년 학생회장 김명수, 미친개 음악선생 김성규를 떠올리며 욕짓거리를 내뱉은 성열은 방송실 문을 열었다. 먼저 도착해있던 호원과 동우의 모습이 들어왔다. 뭐가 그리도 재미난 얘기를 하고 있는지 문 여는 소리도 듣지 못한듯 해보였다. 성열의 시선이 동우의 어깨 위에 올려진 호원의 손으로 향했다. 묘한 분위기가 풍겨 오는 둘의 모습에서 성열의 맥박이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호원의 얼굴로 향해있던 성열의 시선이 씁쓸한 미소와 함께 바닥으로 떨구어졌다. 등을 돌려선 성열은 쓰디쓴 미소를 머금으며 방송실을 나섰고, 호원에게 카톡을 보냈다. [ 오늘 몸이 안 좋아서 먼저 집에 간다. 내일 보자…. ] 학교 정문을 나선 성열은 교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음을 옮겼다. 아무런 생각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버스정류장 앞이였다.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버스를 기다리던 성열의 눈이 건너편으로 향했고 분식집에서 나오는 성종을 발견했다. 그리고 뒤이어 성종을 따라 나오는 우현을 보며 성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울고 있는 성종이와 표정을 잔뜩 구긴채 분식집을 나서는 우현. 대충 무슨 일이 있었던건지 상황이 그려지는듯 했다. 씨발, 남우현 저 새끼 또 내 동생 괴롭히는거야? 성열은 당장이라도 우현에게 달려가 욕을 한바가지로 해주고 싶었지만 건너편에 서 있는 성종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또 다시 그 일이 떠올라 버렸다. [“형도 너 아니면 안돼.”] [“…….”] [“……그렇지만, 이건 아니야. 성종아. 우린 아니야.” ] 성종이 제게 고백했던 날 후로 성열과 성종은 일체 대화를 하지 않았다. 성열은 일부로 성종을 피해 다녔고,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오는 날도 잦았다. 어색한 관계의 나날이 이어졌지만 이런식으로 서로 거리를 두고 지내다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예전처럼 사이좋은 형제로 돌아갈 수 있을거라 그렇게 여겼다. 마음을 굳게 다진 성열은 성종의 시선을 매정히 피했다. 성종의 팔목을 붙들고 놓아주질 않는 우현의 모습이 거슬려 왔지만 애써 무시한채 성열은 때마침 도착한 버스에 몸을 실었다. * * * 건너편에서 성열을 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활발한 성열과는 다르게 성종은 무척이나 내성적이었고, 그 때문에 성종은 늘 혼자였다. 그런 성종을 항상 이끌어준 것이 성열이었다. 물론 성열은 그저 형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었지만 성종에게는 그것이 조금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맞벌이로 부모님이 저를 돌봐주지 않을 때 한살 터울의 성열만이 유일하게 저를 챙겨주었다. 성종의 세상은 오로지 성열로만 가득 차 있었다. 처음 이 감정을 깨달았을 때는 죽고 싶었지만 간신히 마음을 추스렸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 내 마음에 오로지 형밖에 가득 찰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분명한데…… 성종은 살짝 발을 뗐다. 그러나 이내 제 손목을 붙들어 오는 우현 때문에 제지를 당했다. "뭐야!!" 우현을 뿌리치려 악을 쓰면서 성열을 애처롭게 쳐다봤다. 형, 나좀 구해줘. 응? 그러나 성열은 끝내 성종의 시선을 외면하고 그대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성열이 탄 버스가 그대로 가버리자 성종은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멍하니 버스가 간 쪽을 바라봤고, 우현은 이를 갈면서 성종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씨발, 졸라 애절한 척은 혼자 다 하네." "……." "너 이거 정상 아니야, 알아? 그래, 남자를 좋아하는 것까진 그렇다 쳐. 그 정도는 뭐 나도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어. 근데, 그 상대가 형제라는 게 말이 돼?! 그것도 이복이 아닌 같은 아빠 씨에 같은 엄마의 뱃속에서 나온 친형제를? 야, 너 이거 정신병원 감이야!!" "…깡패새끼야, 함부로 말하지 말랬지." 허, 이젠 아주 대놓고 대들기라도 할 작정이냐? 성종이 저를 쏘아보면서 욕을 지껄이자 우현이 픽, 하고 웃더니 이내 성종의 멱살을 잡고 으르렁거렸다. "이년이 근친을 하더니 겁대가리까지 상실했나." "씨발, 놔!!" "근데 아까 보니까 이성열은 그냥 생까고 지나가던데… 그때 내가 듣다 말고 가서 잘 모르겠는데, 쟤 너 찼지? 더럽다, 역겹다 그러면서 너 찼지?" "이 개새끼야!!!" 계속되는 우현의 독설에 성종은 얼굴을 붉히면서 소리를 질렀고, 이내 주먹을 쥐고 우현의 뺨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그 힘이 제법 세서 우현은 꽉 잡고 있던 성종의 멱살을 저도 모르게 놔버렸고, 그대로 뒤에 있는 전봇대에 등을 부딪쳤다. 하, 존나 말라빠져가지고 힘이라곤 없을 줄 알았는데 제법 손이 맵다. 하지만 아까 전에 이어서 한번 더 맞으니 저도 자존심이 상했다. 우현은 그대로 성종의 배를 발로 차 넘어뜨렸고, 그 위에 올라타 사정없이 성종을 패기 시작했다. 계속 맞기만 하던 성종은 우현의 팔을 물어 전세를 역전시켰고, 그렇게 한참동안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싸웠다. 씨발, 존나 아프다. 몸도, 그리고 마음도. * * * "호원아, 카톡 왔어." 집에 가는 길에 진 사람이 바나나우유를 사주기를 내기로, 저 혼자 게임에 빠져있을때완 달리 동우의 휴대폰을 들고선 한창 신나게 게임에 빠져있던 호원은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제 카톡 진동으로 인해 동우가 부르는 목소리에 태연히 제 휴대폰 잠금 비밀을 불러주었고, 그럼 그의 말에 따라 잠금을 풀고 문자를 대신 읽어주는 동우다. 그런데 어째 목소리가 자꾸만 기어 들어간다. 그런 동우가 괜스레 걱정스러워 호원은 결국 하던 게임을 멈추고서 제 휴대폰을 뺏어 들어들었다. 그런데 제가 막상 읽어보니, 별거 아닌거다. "병 안나면 이상한거게? 신경쓰지마요, 재수가 없었던거지 아침부터. 하필이면 미친놈 세트한테 잘못 걸려서는. " "지각해서 벌 받고 병 난거야, 성열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물어오는 동우를 보며 호원은 아마도? 라며 그렇지않고서 뭐 다른게 또 있겠느냐며 대수롭지않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나 그런 저를 보면서도 성열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좁힌 미간을 풀지 못하고 있는 동우를 보고 있자니, 얕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호원은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서 제 휴대폰 속 카톡창을 들여다보며 연신 어쩌냐 열이, 하고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동우를 보며 그에게 걱정하지말라 팔을 뻗으려다 말고 무슨 생각인지, 이내 입가에 씨익 뜻 모를 미소를 짓더니 마른 헛기침과 함께 운을 떼었다. "나두 아프거든요?" 응? 아파, 호야가? 동우는 제 귀를 의심하며 그제야 휴대폰 액정만 들여다보고 있던 시선을 들어 전보다 더 눈을 크게 뜨고서, 호원과 눈을 마주치며 강아지마냥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원이도 아파? 왜에? 응? 어디가, 아픈걸까나?" 뭐야, 이 반응은. 호원은 괜히 왜 성열이 자식만 걱정하고 내 걱정은 않느냐고 따져 물으며 어쩔 줄 몰라하는 동우의 모습을 보고자, 골려주려는 마음으로 꺼낸 말이였는데 어째 제가 더 골이나는 것 같았다. 나는 뭐 어디 아프지도 못하나? 발끈하기는 하는데, 정말이지 도무지 네가 어디가 아프다는건지 모르겠다는 순진한 얼굴로 제 얼굴이며 몸을 위 아래로 훑어보는 동우를 보자니 결국 다시 곧 골이 났던 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사이로 피식, 하고 새어나오는 미소였다. 여느때처럼 오늘도 이렇게 장동우 순진함 앞에 힘없이 푹, 죽어버리는 이호원의 욱이였다. "아프긴 누가 아파! 그냥 해본말이예요, 헛소리지 뭐. 됬어요 귀담아 들을 필요 없던거였어." "뭐야아? 그냥 해보는 말로 아프다고 그러는 사람이 어딨어?!" 또또또 잔소리 하려고 그러네. 여하튼 따지기는? 애초에 설마하는 눈으로 믿지도 않았으면서, 무슨 뻥을 쳤다고 이렇게나 억울한 얼굴을 하는건지 원. 호원은 여기서 조금만 더 있다간 애써 둘러 댄 제 말에 굳이 또 따지고 들 동우의 잔소리로 귀찮아지기 전, 미리 제 가방과 동우의 가방을 챙겨 들었다. " 어, 가방 들어 주는거야? " 동우의 말에 호원이 픽, 웃으며 고개를 두어번 끄덕여 보였다. " 대신에 형이 피씨방 쏴요. " " 에이 뭐야. 무언가를 바라고 하는건 선행이 아니지! " 이럴줄 알았다는듯 동우가 뾰루퉁한 표정을 해보였다. 동우의 반응이 재밌는지 킥킥 소리 내어 웃던 호원이 방송실 전원 스위치를 내리고 재빨리 방송실을 나섰다. 깜깜해진 방송실에 홀로 남은 동우를 보며 호원이 거기 계속 있으면 귀신이 잡아가요. 라고 우스겟 소리로 말하자 화들짝 놀란 동우가 재빨리 일어나 호원을 쪼르르 따라 나섰다. * * *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어어, 성규씨. 잘가. 야자가 마치기 5분 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성규가 교무실을 서둘러 나왔다. 아, 오늘 데리러 오기로 한 날이었는데 깜빡 했었네. 기다리겠다. 답지 않게 허겁지겁 신발을 챙기는 폼이 우스꽝 스러웠다. " 어. 지금 어디야? " " 학교 앞이야. 천천히 나와. 기다리고 있을게. " 성규가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놓고선 정문을 바라보았다. 검은색의 익숙한 차가 눈에 보이자 성규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 뭘 보고 그렇게 웃습니까? " 성규는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명수의 목소리가 화들짝 놀라며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뭐야. 명수는 아무런 말 없이 성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애인 만나러 가요? " 무슨 소리 하는거야. " " 밖에 차…, 선생님 애인 아니예요 ? " 성규가 어이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 있던 명수가 등을 돌려 다시 제 교실로 천천히 걸어갔다. 주머니 속에서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몸을 떠는 휴대폰을 들어올린 성규가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 듯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어어.두준아. 아니야. 금방 나갈게. 좋았던 기분이 다시금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 * * "너 라이벌 생겼다? 어떤놈이 나 좋대." 반나체로 침대 위에 걸터앉아 담배를 빨아들이던 성규가 재미난 일이라도 생각난 듯 살풋 웃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의 벗은 상체에는 쇄골이며 가슴팍에 붉은 흔적들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 흔적들을 남긴 남자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성규의 앞에 섰다. "라이벌?" 되묻는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묻어난다. "긴장해. 병신같지만 잘생겼어. 나 얼굴 엄청 밝히잖어." "그래서 나랑 만나는거구." "응. 잘 아네." "나랑 만나면서 클럽 끊은줄 알았어. 아냐?" "클럽에서 만난거 아닌데. 학생이야. 것도 전교회장." "아저씨주제에 능력있다?" "짜증나, 너. 누구보고 아저씨래." "니가 아저씨가 아님 뭐야?" 실실 쪼개는 꼴이 얄미워 죽겠다. 윤두준 너 질투도 안나지? 성규가 눈을 흘기며 묻자 두준이 고민하지도 않고 곧바로 대답한다. "어." 진짜 싫어- 성규가 침대 위에서 일어나 두준의 어깨를 밀치고는 바닥에 떨어진 저의 니트를 주워입으려 했다. 뒤에서 그의 허리를 끌어안는 두준만 아니면. 두준이 성규의 허리를 끌어안은채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저리치워." 성규의 말에 두준이 푸스스- 웃음을 뱉어냈다. 퉁명스러운 말투가 평소 성규답지 않게 애같아 보여 마냥 귀엽다. 살짝 혀를 내어 핥으니 성규가 두준의 얼굴을 밀어냈다. 돌아본 그의 표정은 여전히 싱글벙글. 그에 더욱 배알이 꼴려 미간을 잔뜩 구겼다. 두준이 성규의 미간에 짧게 키스하고 떨어지더니 성규와 눈을 맞췄다. 여전히 심통이 난 얼굴. 진짜 오늘은 김성규 안같네. 신선하고 새롭고 또, 진짜 재밌어- "어린애랑은 안어울리는 당신 신조 알아. 더구나 자기 학교 학생이면 더 말 할것도 없잖아. 굳이 질투할 필요성 못느껴서 그랬어" "응, 그래 너 잘났어." "해달라고 하면 못할거 없는데, 해줘?" "자신만만이네, 진짜 짜증나게." "투정 그만부려. 확실히 귀엽긴 한데 , 난 어른 김성규가 더 좋아." "그거 섹스때문은 아니구?" "다 포함됐지, 뭘. 됐으니까 키스나 해줘. 입씨름했더니 목말라." "갈증이면 물 마셔." "당신 침이 더 달아." "토나오네 진짜." 입가를 끌어당겨 웃으며 두준의 목 뒤로 팔을 둘러 당긴다. 성규와 두준의 입술이 맞닿고 그대로 두준의 혀가 성규의 입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온다. 진짜로 갈증을 해결하려는 듯 무섭게 밀어붙이는 두준에 성규의 허리가 뒤로 꺾인다. 질척이는 소리가 방안을 메우고 아쉽게 떨어진 두 입술 사이로 길게 은색 실이 이어진다. "아직도 갈증나." "그래서." "당신 이쪽도 달지않아?" 두준이 성규의 바지 버클 부분을 살짝 잡아당기며 묻는다. .성규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린다. 너 무슨 중년 아저씨니? * * * 성열은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다 집 주변에 위치한 공원으로 걸음을 돌렸다. 자판기에서 음료수 한 캔을 뽑아든 성열이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시원스런 소리와 함께 캔을 딴 성열이 꿀꺽 꿀꺽 음료수를 넘겼다. 그럼에도 계속 목이 타오르는 듯한 갈증에 성열은 남은 음료수를 모두 삼켜버렸다. 대체 왜 성종이 울음을 터뜨린 것이며, 그 뒤를 따르던 우현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왜 저를 바라보던 성종의 눈길을 그리 매정하게 잘라내고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성종과 다시 친한 형제 사이로 돌아가고 싶었다 해놓고서는 왜 성종을 외면한 것인지. 성열은 저도 제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성열의 손에서 음료수 캔이 우겨졌다. 쓰레기통으로 구겨진 캔을 던졌지만 캔은 쓰레기통의 모서리를 맞고 튕겨져 나왔다. 성열은 입술을 깨물려다 그러면 입술이 상한다며 걱정을 하던 동우가 생각나 어금니를 꽉 물었다. 이러면 이 상한다고 또 걱정해줄래요, 형? 성열은 뒤죽박죽인 제 마음들에 튕겨져 나와 바닥을 구르고 있는 캔을 발로 차버렸다. 캔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저 멀리로 나가떨어졌다. 성열은 한참을 또 그 곳을 서성이다 집으로 향했다. 도어락을 해제하고 현관으로 들어서니 아무렇게나 놓여져있는 성종의 신발이 보인다. 원래 같으면 신발 두 짝을 가지런히 모아 놓을 아이인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두 짝 모두 자유분방하다. 성열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신발을 정리하고, 자신도 신발을 벗었다. 거실로 들어서니 소파에 잔뜩 웅크려 앉아 무릎에 고개를 파묻은 성종의 자그마한 몸이 보인다. 성열은 복잡한 마음을 애써 짓누르며, 아까의 분식집에서의 성종은 보지 못했다는 듯 야자 안 했어? 하고 놀란 척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성종은 한참을 대답이 없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성종이 얼굴을 들었다. 성종의 얼굴은 눈물범벅으로 모자라 구석 구석 피딱지와 생채기가 서려있었다. 성열은 이번에는 정말로 놀라 성종의 앞으로 바짝 다가가 앉아 성종의 두 볼을 감쌌다. "이거 다 왜 이래!" "형은 그런 말 할 자격 없어! 알아?! 나 봤잖아! 봤으면서 왜! 왜 야자 안 했냐고 놀란 척하고 물어? 왜!" 성종의 두 볼을 감싼 성열의 손이 젖어들어갔다. 성열은 젖어드는 제 손을 느끼고는 성종의 볼에서 제 손을 거두고는 저의 방으로 향했다. "형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씻고, 주방 찬장에 구급상자 있으니까 꺼내서 약 발라." 성종은 저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을 잇고,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성열에 소리를 내어 울었다. 눈물이 닿아 따가운 상처들보다 제 마음이 더 따가웠다. 성열은 성종의 울음소리를 모두 듣고있음에도 모르는 척 했다. 성종아, 우리가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나는 그러지 못할까봐 너무 무서워. 너를 이렇게 쳐내는 게 잘못된 일이란 것도 잘 알지만 내가 그렇지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 어쩔 수가 없어. * * * 우현은 자신의 머리칼을 흐트렸다. 그렇게 쓰러져 떨고있던 성종을 골목에 버려두고 온 뒤 탔던 버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차를 멈추어 세웠고 이 골목으로 다시 달려왔을 때, 성종은 온데간데 없었다. 자신의 손과 발에 터지고 찢겨진 몸을 하고서도 제 눈을 똑바로 보던 그 눈에 숨이 막혀 그대로 돌아섰던 우현이었다. " 내가 왜 여기 온거냐, 시발...... " 어이없다는듯 허탈하게 웃은 우현은 잠시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고 전봇대에 기대어섰다. 계속 생각해왔다. 하지만 알 수가 없다. 누구든 자신의 눈에 어긋나버리면 다 때려 부수고 너덜 너덜하게 만드는 것이야 저가 원래 하던 더러운 짓거리였지만, " 왜. " 왜- 이성종이 자신의 눈에 어긋나 버렸는지를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다. 그가 조그마한 몸을 하고서도 그 눈빛이 드세서? 그가 게이라서? 역겹게도 자신의 형을 좋아해서? 아니. 전부 아니야.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온통 뒤엉켜 더러운 느낌마저 들어, 보이는 모든 것을 바스라뜨리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 알게 뭐야... 좆같네...... " 모든게 그저 이 거추장스러운 분노를 그에게 풀어내고 싶어서일뿐, 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자 순식간에 마음이 홀가분해진 것에 만족감이 밀려왔다. 내일 학교에서 성종을 볼 생각에 우현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걸쳐졌고, 순간 자신의 그 웃음이 조금 묘하다 느끼며 발걸음을 돌렸다. * * * 명수는 걷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어쩐지 비릿한 기분이 맴돌아서 그에 걸맞게 피식, 하고 비릿한 웃음을 흘려보냈다. 아무렴 어때. 그런 사람에게 남자가 없다는 것 정도는 말이 안되지. 애써 자기 위안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검은색의 차, 그리고 그것을 보며 본적없는 미소를 지어보이던 그. 선생님. 혹은, "김성규." 그 사람의 이름은 언제나 내 가슴께를 간지럽게 했다. 생전 태어나 감정이라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는 그에게, 짝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했다. 이름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설레고 있는데 어쩜 자신이 참 미련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명수는 길을 걸었다. 저만치 집이 가까워져 오는데 알수 없게 마음이 심란해지고 있었다. 명수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떠오르는 의구심과 함께 뒤를 돌았다. 그리고는 집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달음질 쳤다. 이렇게 모른척 하는 것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이 내 사랑에 도움이 되는 일일까. 첫사랑은 슬프다는 그런 실패한 자들의 비겁한 변명따위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이제껏 자신이 실패한 것이 없는 만큼, 김성규를 갖고 싶다는 욕만 또한 어마어마하게 자라나고 있어서 옳은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해서든 그를 가져야 겠다 생각했다. "갖고싶어, 김성규 너라는 사람." 저의 이런 쓸데 없는 소유욕과 집착을 알지 못하고서 성규의 집을 향해 달렸다. 전교 일등이라는 자리가 이렇게도 편한 자리일 줄이야. 얼마전 중요한 서류를 성규 선생님께 전해주고 오라며 저에게 서류뭉치를 내밀었던 늙은 선생이 떠올랐다. 알게 모르게 명수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맴돌고 있었다. 그의 남자가 있든, 둘이 신나게 뒹굴고 있든 알게뭐야. "김성규만 내가 가지면 돼." * * * "데려다줘서 고마워. 잘 자." "…자고 가라니까." "난 내일 출근인 걸." 가벼운 굿바이 키스를 나누고 돌아선 성규는 저를 바라보고 있는 익숙한 교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우리 학교는 왜 사생활이라는 걸 보장해 주지 않는 거야? 터덜터덜 걸어가 녀석을 지나쳐가려는데 녀석이 손목을 붙들어왔다. 좆고딩 주제에. "…뭐냐." "전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선생님이." "……." 뭐 얼마나 급한 서류라고. 서류를 받아 들고 돌아서려는데 여전히 잡힌 손목이 녀석의 손 아귀에 있었다. 이제 그만 놓지 그래? 하는 눈으로 바라봤을 뿐인데, 녀석은 아무런 말도 없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깊은 눈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운 곳, 달빛이 반사된 그 눈은 새파란 느낌이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바라만 보고 있기에 바로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뿌리쳐진 손이 바닥에 팔랑 거린다. "…걱정마요." "……." "버려지는 건 익숙합니다." "……." 낮은 목소리로 울리는 목소리가 발목을 붙들었다. 멈춰서 시선을 돌렸을 때 여전히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이 꽤나 단단했다. 푸- 하고 짧은 한숨을 쉰 녀석이 저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익숙하다구요. 그러니까." "……." "쉽게 포기할 생각 없단 뜻입니다." "……." "…몇 번이고 버려져도 전 포기 안한다구요." 녀석이 웃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가볍게 웃음을 보인 녀석이 어깨를 한 번 돌리고 다시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갔다. 짧은 웃음, 착각이었을까? "…좋아한다고. 김성규. 그 거, 잊지만 말라고." "…….” "학교에선 선생님 취급 해드릴게요." "…너 이러는 거 다른 선생들이 알면 개거품 물 걸. 이중인격자." 내 말에 녀석은 아무 표정도 없이 어깨를 으쓱하고 돌아설 뿐이었다. 그 뒷 모습이 조금 외로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렇다고 마음이 흔들리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야. "…두준아, 집에 가는 중이야?" - "운전 중." "…차 돌려." - "…에?" "우리 집에서 자고 가." 짜증스러운 밤이다. * * * 성종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이런 몸 상태로 오늘 하루를 교실에서 버텨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개같은 남우현 때문에 학교를 빠지는 일도, 잔뜩 상처 받고 형을 포기한 것 처럼 보이는 일도 전부 다 싫었다. 어젯밤 성열이 그렇게 방으로 들어가버리고 성종은 제 손으로 상처를 치료하지도 않았다. 그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울다 지쳐 잠이 들었고 오늘 아침 깨어났을 때 그의 형은 이미 집을 나간 후였다. 그리고, " 야. " 남우현이다. 넌 뭐가 좋다고 나를 부르니. 나도 너 싫고 너도 나 싫으면 제발 서로 무시하면 안되겠니…. 우현이 어제 성종의 몸에 남긴 상처들은 평소 말도 섞지 않던 아이들이 성종에게 괜찮냐고 물어올 정도로 심각했지만, 그것은 성종의 주의를 전혀 끌지 못했다. 학교 뒷뜰의 벤치에 앉은 성종과 그의 다리를 발로 툭툭 건드리는 우현. 그리고 한참 전 부터 교실 창문을 통해 이 쪽을 내려다 보고있는 형. 이성열. 성종은 그의 눈길에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차라리 이성열이 천하의 빌어먹을 개놈이면 좋겠다 생각했다. 저를 데리고 놀거나 아니면 저를 인정사정 없이 매몰차게 버려준다면 자신도 이렇게 질척거리고 힘들진 않을꺼라 생각하면서. " 시발아. 쌩까냐? " " 나 좀 제발 내버려 둬. " " 내버려- 둬-? " 우현은 너 미쳤냐?, 하며 성종의 얼굴 가까이로 자신의 얼굴을 들이 밀었고 성종은 눈을 질끈 감았다. " 눈은 왜 감냐. 드럽게 키스라도 해달라고? " " ...... " " 대답해. 이 자리에서 뒈지기 싫으면. " " 네 얼굴 보니까-" " ...... " " 토할 것 같아서. " 성종의 그 말이 끝나자마자 우현의 손바닥이 그의 여린 뺨을 향해 날라갔고 벤치로 구겨지며 넘어가던 성종이 창문을 봤을 때, 성열은 사라지고 없었다. 형. 형은 지금 내게 오고있는 걸까...... ... 그랬으면 좋겠다. * * * "흐허허헣, 그럼 마지막으로 인피니트의 내꺼하자를 듣고 아침방송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점심 때 봐요~ 흐허허헣!" "아, 선배! 선배는 진짜 다 좋은데 그렇게 좀 웃지 마요!! 명색이 아나운선데 그렇게 웃으면 무슨 영구같잖아요!" 엔지니어를 맡고 있는 2학년 후배가 애원하듯이 부탁하자 동우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머쓱해했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아아, 선배 제발…!! "나 그만 가볼게." 그러나 정작 본인은 태평하기만 하니, 이건 뭐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다. 3학년 엔지니어 선배가 그에게 말했다. 쟨 그냥 포기하는 게 좋아, 라고. * * * 또 손을 올려버리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하자고 말을 걸었던 건 아닌데… 이렇게 손이 먼저 올라가는 버릇이 생긴 건 다 제 아비 때문이라고 우현은 생각했다. 술만 먹었다 하면 손부터 올라가던 인간이었으니, 어렸을 때부터 그거만 보고 자란 내가 거기서 뭘 더 배웠겠어. 사람 패는 법부터 배워먹었지. 괜히 짜증이 밀려 들어와서 담배를 한대 꺼내물었다. 아니, 그런데 이놈 자식들인 왜 이성종한테만 괜찮냐고 묻는 거야? 나도 많이 다쳤다고!! 씨발, 내 팔 봐봐!! 존나 이빨자국 선명하잖아!! 얼굴은 이성종이 손톱으로 막 할퀴고 때리고 한 탓에 완전 엉망진창이 됐다고!! 우와, 이거 생각해 보니까 되게 화나네? 우현은 반 아이들에게 화풀이를 하기로 결심하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나, 우현은 참으로 재수없게도……. "학생이 대놓고 담배를 무는 학교는 아마 우리 학교밖에 없을 거다, 남우현 학생." …씨발, 좆같은 김성규다. 우현은 그대로 성규에게 끌려갔다. * * * 그것은 성종의 착각이었다. 성열은 저에게로 오지 않았다. 아아, 그건 순전히 내 희망사항이었을 뿐이구나. 성종은 처음으로 고백한 것을 진심으로 후회하기 시작했다. 이 마음, 그냥 숨기고 살걸. 그랬다면 평화는 깨지지 않았을 텐데. 어제는 집에 들어오긴 했지만 그날 이후로 성열은 조금씩 바깥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부모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사이에서 성종은 차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게 다 나 때문이야. 나 같은 쓰레기,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흐, 흐읍…." 내가 쓰레기인 걸 아는데, 그런데도 이 마음을 쉽게 멈출 수가 없어. 나 정말 어떡하지? 겁도 더럽게 많아서 자살같은 건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하겠다. 그냥 차라리 누가 저를 죽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 싫다. 자꾸만 저를 괴롭히는 우현도, 계속해서 저를 피하는 성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얼핏 열도 나는 것 같았다. 성종은 담임에게 허락을 받고 조퇴증을 끊고 힘없이 교실을 나섰다. 그때, 성규에게 제대로 한소리 듣고 온 우현이 성종이 나가는 것을 봤다. "쟤 어디가냐?" "조, 조퇴하는데요." 우현은 그대로 성종을 따라 나섰다. * * * 하여간, 선배도 진짜. 아침부터 방방 뛰네. 뛰어. 잠 확 달아나겠다. 호원이 피식 웃어보이며 책상 위로 엎어져 있던 몸을 일으켜세웠다. 옆에서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인기척에 성열이 귀에 꽂혀 있던 이어폰을 빼고서는 고개를 돌려 호원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왜? 아니, 그냥. " 자식. 싱겁기는. " 야. 성열아. 지금 몇시냐? 호원이 묻자 성열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더니 그의 등을 문 쪽으로 떠밀었다. 동우형 나올 시간이야. 호원이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씨익 웃었다. 성열은 붉게 달아오르려는 얼굴을 황급히 숙이고 다시 제 귀에 이어폰을 꽂아넣었다. 야야. 이성열. " 왜? " " 매점 갔다 올거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 성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그럼 말고. 호원이 경쾌한 걸음으로 교실을 나서자마자 책상 위로 엎어져버린다. 진짜 이호원…. 고작 한 번 물어보는 게 끊이냐. 동우 선배였음 백 번도 넘게 물어볼 거였으면서. 성열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 * * 야, 이성종. 야. 아무리 입이 닳도록 이름을 불러대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우현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앞서 걸어가는 성종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야. 갑자기 저를 돌아세우는 손길에 놀란 성종이 비틀거렸다. 뭐야. 우현이 말을 더듬으며 휘청거리는 그의 몸을 부축했다. 가라고 저를 밀어내는데, 힘이 하나도 안들어갔다. 성종이 풀린 눈으로 우현을 바라보며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왔다. 우현이 다급하게 성종의 이름을 불렀다. 야, 이성종!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성종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 * * 뭐? 그냥 갔다고? 6교시 음악시간, 우현과 성종의 반에 들어온 성규는 우현이 무단조퇴를 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하, 이 건방진 놈! 아까는 담배를 꼬나물고 있더니 이제는 무단조퇴까지? 화가 끝까지 난 성규는 그냥 너네끼리 자습하라는 말과 함께 교실을 나갔다. 이 자식이, 그렇게 막 나간다 이거지? 부모님한테 연락해야겠단 생각까지 미치던 성규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대로 걷던 것을 멈추었다. 「 특이사항：편부 슬하, 모친은 다섯 살때 잦은 폭력으로 인해 사망. 」 …아아, 그랬다. 우현의 가정환경은 무척이나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선생님들 말로는 우현의 집이 달동네에서도 제일 높은 곳에 위치했다고 했다. 거기다 어머니가 잦은 폭력으로 인해 사망했다면 그 아래에서 자랐을 우현이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았을리가 만무했다. 아아, 제기랄. 생활기록부를 봐놓고도 이렇게 까먹고 있었다니…… 성규는 주먹으로 제 스스로에게 꿀밤을 먹였다. 병신아, 넌 선생 자격도 없어. 젠장, 이게 다 그 김명수라는 망할 놈 때문이다. 그 녀석이 자꾸 내 신경을 건드리는 바람에…. 아무래도 조만간 우현과 면담을 해야할 것 같았다. * * * "…하아." 점점 열리는 시야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마 위로 얹어진 시원한 무언가가 성종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이마 위에 무엇이 얹어졌나 만져보니 수건같은 재질의 천이 찬물에 푹 젖어있는 채로 제 이마 위에 있었다. 성종은 무의식적으로 슬며시 미소를 지으면서 온전히 눈을 떴다. 그러나 눈을 다 뜨자마자 보인 것에 성종은 바로 미소를 거두었다. 슬쩍 돌아보았다. 제가 누운 곳은 벤치,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현의 무릎 위였다. "…뭐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거든? 갑자기 쓰러져가지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 "일어날 생각 하지마, 열이 아주 펄펄 끓더만."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이년이…!!" 무심코 손을 올리려다가 아차, 싶어서 우현은 도로 손을 내렸다. 성종은 여전히 저를 매섭게 쏘아보고 있는 채였다. 우현은 한숨을 한번 내쉬다가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꺼냈다. "존나 너 업고 여기저기 다니다가 응급실은 돈이 없어서 못 가고, 그래서 일단 약국부터 가서 해열제랑 뭐 이런저런 것들 산 뒤에 여기 공원 와가지고 너 잠깐 눕혀놓은 뒤에 수돗가에서 수건 적셔서…… 뭐 대충 그렇게 된 거야." 횡설수설하긴 했지만 대강 어떻게 된 건지 충분히 상상이 갔다. 성종은 왠지 우현이 저를 업고 다니면서 얼마나 쩔쩔 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아, 안돼. 겨우 이 정도 일가지고 내가 이 자식을 용서할 수는 없……. "…어?" 어제 맞은 곳 여기저기에 밴드가 붙여져 있었다. 성종은 놀란 눈으로 우현을 쳐다봤다. 우현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머쓱하게 머리만 긁적일 뿐이었다. * * * 동우는 호원과 성열의 사이에 끼어서 난처하기 그지 없었다. 둘이서 오늘 짜기라도 한 것인지 호원이 입을 열면 바로 그 뒤를 따라 성열이 입을 열었고, 성열이 입을 여나 싶으면 또 호원이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둘 모두에게 대답을 해주려 끙끙대었지만 그것이 계속 반복이 되니 동우는 잔뜩 울상이 된 채 응, 아니, 정도의 짧은 대답들만 내뱉었다. 눈치 없는 호원과 성열은 동우가 그런지도 모르고 저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느라 바빴다. "형, 그래서요. 형? 왜 그래요?" 그래도 그나마 성열보다는 눈치가 있는 호원이 동우의 상태를 눈치 채고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였다. 동우는 호원의 말에 그저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호원은 뭐가 잘못 되었구나. 싶어 살며시 몸을 낮추었다. 아래로 뚝 떨어진 동우의 눈꼬리에 호원은 슬핏 웃음이 새었다. 귀여워 죽겠어, 정말. "형, 말을 해야 알죠. 응?" "동우형, 왜요?" 이제는 성열도 동우의 옆에서 동우를 채근한다. 왜요-. 형, 왜요-. 애교 섞인 성열의 말꼬리에 동우가 푸스스 웃었다. 호원은 그래도 기분이 풀린 듯해 보이는 동우의 얼굴에 안심을 하면서도 질투가 났다. 지금 저런 같잖은 애교에 녹아 내린 거야?! 그래도 호원은 싫은 티를 내기가 싫어 입술만 불퉁거리다 말았다. 집 방향이 다른 성열과 헤어지고나서 호원은 동우와 말 없이 길을 걸었다. 동우는 말이 없는 호원에 계속해서 호원의 눈치를 보았다. 저와 함께 있을 때면 할 말이 있다 못해 넘치는 호원이 조용하니 동우는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랐다. 그저 호원의 눈치만 볼 수 밖에.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 동우네 동 앞에서 호원은 우뚝 멈추어섰다. 안으로 들어가려 계단을 밟던 동우는 저의 발소리만 들리길래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들어가요-. 동우형-." "으으! 호야아! 왜 그래." 동우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는 손사레를 쳤다. 성열이 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에 호원은 잔뜩 인상이 굳었다. "갈게요." 호원은 그 말만 툭 내뱉은 채 휙하니 뒤돌아 걸어가버렸다. 동우가 호야! 호야아! 호원아!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기분이 상할대로 상해버린 호원은 들은 척도 않았다. 이성열 그 자식한테는 잘도 웃어줘놓고서 나한테는 왜 그래? 허! 사랑이 식었어. 호원은 궁시렁대며 아파트 단지를 빠져 나갔다. 반면에 동우는 도대체 호원이 왜 저러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어 답답함에 발만 동동 굴렀다. 동우에게 다정하게 굴기는 했던 호원이었지만 저런 식으로 나오니 동우는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다. 호원을 붙잡으러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집으로 들어가기도 뭐해 동우는 낮은 계단만 오르락 내리락 거렸다. 그러다 문득 성열이 왜요-. 형, 왜요-. 하며 귀엽게 굴던 것이 생각났다. 혹시 호야가?! 동우는 입가로 번지는 웃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흐응. 호야가 질투도 다 하고. 동우는 작게 웃음소리를 내어 웃었다. * * * "우와, 존나 높다." 말로는 바래다주겠다고 했지만 실상은 우현이 성종을 따라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성종은 굳이 우현을 밀어내지 않았다. 둘 사이에는 서먹서먹한 분위기만 흘렀고, 이내 성종이 사는 아파트단지에 도착하자 우현이 꼭대기를 쳐다보면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뭐야, 촌놈같이. "너 아파트 처음 봐?" "처음 보는 건 아닌데 이렇게까지 높은 건 처음이지." "……." "약, 꼭 먹어라. 안 먹으면 알아서 해." 협박조로 말하는 모습에 성종이 피식 웃었고, 그에 우현이 괜히 성질을 부리면서 말했다. "왜 웃어?!" "웃기니까 웃지, 내가 약 먹을지 안 먹을지 니가 어떻게 알 수 있는데?" "…폰 내놔." 우현이 불쑥 제게 폰을 내놓으라 손을 내밀자 성종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우현을 빤히 쳐다봤고, 그에 우현이 왜 안 내놓냐며 버럭 소리를 지르자 성종은 인상을 찡그리면서 폰을 우현의 손에 쥐어주었다. 헐, 스마트폰이다. 우현이 또 다시 감탄사를 내뱉었고 성종은 그런 우현을 마뜩찮게 쳐다봤다. 이내 우현이 화면을 꾹꾹 누르는 것이 보였고 머지않아 우현의 주머니에서 벨소리가 들려왔다. 우현이 폰을 꺼내는 모습을 보던 성종은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떴다. 요즘에 거의 멸종 직전이라던 2G 폴더 폰이었다. "이따 저녁에 전화할 거니까, 구라 깔 생각은 하지도 마. 알았어?" "……." "자, 여기. 내 번호 저장할라면 저장하고. 하기 싫음 말고." 우현이 성종에게 다시 폰을 돌려주었고, 성종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제 폰을 다시 받아들었다. 우현은 바로 뒤돌아서 가려다가 이내 다시 성종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성종은 여전히 멀뚱멀뚱 서 있는 채였다. 우현은 한참동안 저 혼자 안 들리는 말로 뭐라뭐라 중얼거리다가 간신히 말을 꺼냈다. "…미안." "어?" "씨발, 미안하다고." "넌 미안하단 말을 욕하면서 해?" "아이 씨, 그냥 미안하다면 그런 줄 알아!!" 성종이 쏘아붙이자 우현은 다시 한번 성질을 냈고, 그에 성종이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면서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이런, 젠장. 또 내 성질을 못 이기고 화를 내버렸다. 씨발, 이놈의 핏줄이란게 뭔지… 할 수만 있다면 이놈의 더러운 피 다 뽑아버리고 싶은데…… 우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그럼 나 다신 안 괴롭힐 거야?" "…어?"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럼 다신 나 괴롭히지 않겠다는 말이랑 같지. 안 그래?" "……." "…고마워, 아까 전에 나 돌봐준 거." 어쨌든 이 녀석 아니었음 난 그대로 길바닥 신세였을 테니까, 성종의 감사표시에 우현은 헛기침을 하면서 괜히 제 뺨을 매만졌다. 어우, 볼이 왜 이렇게 뜨겁지? 더워서 그런가? 에이, 그만 가야겠다. "나 간다." "어." "약 챙겨먹어." "알았다니까!!" 교차점이 보이지 않던 두 소년의 사이가 조금씩 좁혀져 가고 있었다. 우현의 발걸음은 어느새 가벼워졌다. * * * 야근을 마친 성규는 오늘따라 뻐근한 어깨를 휘휘 돌리며 길을 걸었다. 고개를 이리도 틀고 저리도 틀면서. 큰 길에서 벗어나 자신의 오피스텔로 가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익숙한 가로등과 익숙한 그림자. 걷던 자리에서 멈춰서서 한없이 미간을 구겼다. "김명수." "야근하셨나봐요." 기대어 서 있던 가로등에서 일어난 명수가 성규를 바라보았다. 성규는 여전히 인상을 쓴 채 명수에게로 다가갔다. 명수는 단정한 교복 차림이었다. 모범생 아니랄까봐. 성규는 명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보았다. 빼어나게도 생겼다. 정말 짜증나는 스타일이 아닐수가 없었다. 좋은 집안, 빼어난 두뇌. 게다가 외모까지. 성규는 코웃음을 치고는 고개를 돌렸다. 자연스럽게 명수를 지나쳐 가려는데, 어김없이 손목이 잡히고 말았다. 이 아이가 대체 왜 이러는 것인지. 정말 좋아한다는 마음과 그에 대한 표현을 이런식으로 밖에 할 수가 없는 건가. 입술을 꾹 깨물고는 천천히 뒤를 돌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명수야. 돌아오는 대답은 저 만큼이나 단정한 '네'라는 말 한마디였다. "나한테 왜이래?" "좋아한다고 말 했잖아요." "너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식으로 표현하니?" "……." "너 정말 나를 좋아하기는 하는 거야?" "…글쎄요." "뭐?" "누군가를 좋아해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라서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달라요. 김성규, 당신은 다르다고요." 너무 깊은 눈이어서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성규는 짧게 숨을 뱉어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게, 빨리 집에 들어가 약이라도 집어 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성규는 명수의 손에 잡힌 손목을 비틀어 빼내었다. 의외로 쉽게 풀려나는 손목에 놀란 것도 잠시, 자신을 격하게도 끌어 안는 명수에 의해 숨이 턱 막히도록 놀라야 했다. 성규는 명수의 가슴을 밀어냈다. 이거 놔. 매몰찬 목소리에도 명수는 미동이 없었다. "놔. 놓으라고 했어." "선생님. 아니, 김성규." "반말 하지 마. 너한테 반말들을 군번 아니야. 내가 나이가 몇인데 너같은 어린놈에게 반말을 들어? 빨리 이거 놔. 정말 화내기 전에." "당신은 화내도 예쁠 것 같아." 명수를 밀어내던 성규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처음듣는 목소리. 떨고 있는 듯, 한 템포 멈추어 말하는. 명수에게서 찾을 수 없었던 그런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서, 그냥 숨을 죽이고 서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을 안고 있는 이 아이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더 몰아 붙인다면, 어린 이 아이가 왈칵 울어버릴 것만 같아서. 포옥 한숨을 쉬었다. 하루 동안 쌓였던 모든 피로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성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당신이 나한테 욕해도 예쁠 것 같아." "……." "당신이…. 김성규가 나 싫다고 밀어내도. 나는 당신 예쁠 것 같다고." 아이의 품이 포근하다 느낀 자신을 질책하며. * * * 며칠이 지났다. 성열과 성종 사이는 그전보다는 조금 덜 어색해졌지만 둘 사이에 흐르는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성열은 더 이상 밖으로 나돌면 부모님께 불효를 저지르는 것과 진배없다고 생각하여 더 이상 외박을 하지 않았다. 성종은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오는 가족 분위기에 내심 안도했다. 물론, 형을 향한 허락받지 못할 제 마음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하지만, 그보다 더 귀찮은 일이 생겨버렸다. 그것은 바로……. "너 어딜 가? 내 시야 범위권 내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이건 새로 개발한 신종 괴롭히기 수법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 우현은 더 이상 성종에게 윽박을 지르거나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대신에 거의 하루종일 제 옆에 붙어다니다시피 하면서 저를 귀찮게 했다. 하아,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의 스트레스가 있구나. 성종은 지끈거려오는 머리를 붙들었다. 그러자 우현이 바로 성종의 옆으로 오면서 말을 걸었다. "왜! 머리 아파?" "어, 너 때문에." "아, 왜!!" "너 진짜 나한테 왜 이래?! 너 이러는 거 나 적응 안 되거든?" "썅, 그럼 나더러 대체 어쩌라고… 됐어! 나 좋을대로 할 거야!!" 허, 저런 막무가내를 봤나. 저걸 누가 말려 진짜… 성종은 결국 우현을 떼어내는 것을 포기했다. * * * "호야~ 나 왔어!" 점심시간, 동우는 호원과 같이 밥을 먹기 위해 2학년들이 쓰는 층으로 내려와 호원과 성열의 반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호원은 저를 본체만체했다. 으윽, 이게 벌써 며칠째야? 이제까지는 참아줬지만 아무래도 조금 그 부분을 건드려야 겠다. 동우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호원의 귀에다 속삭였다. "호야, 너 설마 질투하는 거야?" "…예?" "질투하는 거냐고~ 너 전에 성열이가 나한테 애교섞인 말투로 말했을 때 내가 웃은 거 보고 너 질투났지!!" 헐, 이 둔한 인간이 그걸 어떻게…… 호원의 두 귀는 어느새 빨개져 있었고 동우는 기분 좋게 웃으면서 짝, 하고 박수를 쳤다. "헤헷, 맞구나!" "아,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만 화 풀어라! 응?" 아아, 역시 장동우를 이길 수는 없는 건가… 호원은 결국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던 성열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혼자 터덜터덜 교실을 나갔다. 그런데 창 밖으로 성종의 모습이 보인다. 그 옆에는 우현이 있었다. 뭐야, 저 자식? 아직도 성종이 괴롭히는 거야?! 이번에는 가만있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성열은 빠른 속도로 아래를 향해 내려가서 둘 사이에 끼어들어 우현에게 따져 물었다. "너 뭐야? 아직도 우리 동생 괴롭혀?" "하, 뭐? 우리 동생? 웃기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너 대체 우리 성종이한테 왜 그래?!" "그런 거 아니니까 그만해!" 성종이 우현의 앞에 서서 항변하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성열은 착잡한 표정으로 바로 발걸음을 돌려버렸다. 우현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성종을 바라보았다. 니가 왠일이야? 성종은 손부채질을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저도 무슨 생각으로 성열의 앞에서 우현의 편을 들었는지 모르고 있었으니까. 온 몸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야, 이성종. 우현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성종을 겨우 따라잡으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 씹냐? " 아, 좀! " "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 아씨, 좀 가봐. 성종이 우현의 어깨를 밀치고선 허겁지겁 교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멍하니 어깨를 잡고 서 있던 우현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천천히 올라갔다. * * * 피아노를 치는 손이 딱 김성규 만큼이나 예쁘다. 명수는 성규의 옆자리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잔잔한 피아노곡을 연주하는 성규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얀 피아노에, 하얀 옷. 하얀 얼굴까지. 그 얄쌍한 눈매가 살짝 치켜올라가 떨리는 것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뭘 그렇게 쳐다봐. 신경 거슬리고 참 좋네. 톡 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수가 피식, 웃으며 성규의 얼굴을 더욱 빤히 들여다 보였다. " 선생님. " " 왜. " " …아니예요. " 재미없다는 듯 성규가 김 빠진 웃음을 뱉었다. 성규는 아직까지 감은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명수가 그런 성규를 빤히 쳐다보다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성규의 뒤로 가 섰다. 선생님. 저 좀 봐요. 조금은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 성규가 감았던 눈을 뜨며 제 뒤에 서 있는 명수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명수가 허리를 숙여 성규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놀란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저를 떨어뜨리려 어깨를 세게 미는 성규의 손을 잡아 챈 명수가 더욱 거세게 몰아붙였다. 한참 뒤, 뒤로 몸을 빼어낸 명수가 반들거리는 성규의 입술을 조심스레 닦아냈다. 선생님, 오늘도 예쁘네요. 손도, 얼굴도. 그리고 여기도. 명수가 웃음을 지으며 성규의 입술을 다시 한 번 훔쳤다. * * * "흐흐, 그럼 마지막 곡으로 넬의 그리고, 남겨진 것들 틀어드리면서 전 이만 사라질게요!" 점심방송까지 마친 뒤 동우는 연신 웃음기를 띄우면서 벌떡 일어났다. 얘들아, 수고했어~ 하면서 손을 막 흔들며 나가는 모습이 영락없는 강아지다. 확실이 아나운서 역할을 하기엔 조금 모자랐지만 특유의 밝은 모습 때문에 이상하리만큼 사람들의 호감을 끌었다. 참, 알 수 없는 마력의 소유자야. 라고 3학년 엔지니어가 피식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누가 걸어다니는 엔돌핀 아니랄 까봐. 동우는 방송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저를 기다리고 있던 호원에게 매달렸다. "호야~" "끝났어요?" "으응!" 조금 무뚝뚝하면서도 알고 보면 다정다감한 호원과 동우는 누가 봐도 잘 어울렸다. 그래, 너무 잘 어울려서 감히 고백조차 못하겠다. 도로 올라와서 두 사람의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던 성열은 한숨을 깊게 내쉬면서 고개를 숙였다.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를 사랑한다는 친동생과, 내 마음은 전혀 몰라주고 다른 이에게만 다정한 친구녀석 사이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괜히 눈물이 차올랐다. * * * "니네, 앞으로 이성종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내가 가만 안 둔다?" 우현이 반 아이들에게 단단히 이르는 모습을 보던 성종은 이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쳇, 누가 누구한테 뭐라는 거야. 우현이 제 쪽으로 오는 걸 보던 성종은 마뜩찮다는 듯이 말했다. "누가 누구한테 뭐라고 해? 애들은 나 안 건드려, 이제까지 나 괴롭힌 건 다 너거든?" "야, 넌 언제까지 나한테 반말 찍찍 할 거냐? 다른 애들은 다 나한테 형이라 그러는데, 존댓말까지는 안 바라니까 형이라고 좀 불러주라! 응?" "됐네요, 부를 거였음 진작에 불렀지. 난 너 형 대접해줄 생각 없어." "에이 씨…." 참 쩨쩨하게 군다. 우현은 혀를 차면서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좀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성종이 제 편을 들어주면서 성열에게 뭐라 하던 모습을. 그 이후로 기분이 조금 하향세인 모양인지 풀이 죽어있는 모습이다. 저럴 땐 어떻게 달래줘야 하는 거지? 누굴 달래줘봤어야 알지, 이놈의 빌어먹을 가정환경 같으니……. "야." "…어? 왜?" "너…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뭐라도 먹으면 너 기분 좀 풀리지 않을까 싶어서. 너 그러고 있는 거 보기 졸라 불편하거든?" 아아, 지금 나를 걱정해주는 거였어? 성종은 놀란 눈으로 우현을 바라봤다. 그리고 왠지 낯설었다. 성열 외에 저를 걱정해준 사람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무척 낯설기만 했다. 이제껏 나를 생각해준 사람은 오로지 형밖에 없었는데, 형 외의 다른 사람이 나를 걱정해 주다니. 게다가 그 사람이 얼마 전까지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남우현이라니… 기분이 이상했다. "…나, 크림빵 좋아해." "오케이, 당장 매점가서 사올게!" 하지만 그게 싫지는 않다. * * * " 너, 적당히 해. "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성규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명수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김명수. 갸르릉 대며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모습이 고양이 같아서 명수는 다시 한 번 입밖으로 웃음을 토해냈다. 이제 종치겠다. " 먼저 가볼게요. 선생님. " 긴다리를 휘적이며 명수가 유유히 음악실을 벗어났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성규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 * * 우현이 야자시간까지 남아있다니, 이것은 거의 모세의 기적과도 같은 것이었다. 물론 그 이유가 순전히 성종 때문이긴 했지만 야자 담당이던 성규는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흠칫, 하고 놀랐다. 너 왜 남아있냐? 하고 묻자 얘가 있으니까요, 하면서 성종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대답한다. 성종은 고개를 푹 숙였고 우현은 뭐가 좋은지 킥킥거리면서 웃었다. 그러다가 성규가 들고 있는 출석부로 맞기는 했지만. 야자가 모두 끝나고, 성종이 가방을 챙겨들고 교실을 나서자 우현이 그 뒤를 쫄래쫄래 쫓아온다. "같이 가!" 저건 진짜 질리지도 않나, 성종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우현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조금 멀지 않은 곳에서 터덜터덜 걸어가는 성열이 눈에 보였다. 성종은 바로 성열에게 달려갔고 우현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쳐다보면서도 마지못해 성종을 따라 뛰어갔다. "형!" "…어어, 성종아." 희미하게 웃으면서 성종과 인사하던 성열은 뒤에서 성종을 따라 쫓아온 우현을 보자 조금 얼굴을 굳혔다. 이 자식은 왜 자꾸 성종이를 쫓아다니는 거지? 혹시 다른 마음이라도 품고 이러는 건가? "너 왜 자꾸 우리 성종이 쫓아다녀?" "남이사." 우현이 퉁명스레 대꾸하자 성열이 이를 악물었고, 두 사람 사이에 껴있던 성종은 안절부절해 하다가 이내 성열의 등을 떠밀면서 말했다. "형, 그만 가자. 너도 그만 너 갈길 가! 너 어차피 나랑 반대방향이잖아!" "그래, 내가 꺼져줄게." 우현이 퉁명스레 말하면서 등을 홱 돌리자 성종은 조금 미안하단 마음이 들었다. 내가 좀 심했나? 아니야, 쟤랑 형이랑 더 부딪쳐봤자 싸움밖에 더 나겠어? 성종은 제가 잘한 것이라 위안을 삼은 뒤 성열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정류장에서 조금 기다리다가 버스가 도착하자 바로 올라탔고, 둘은 반대쪽 자리에 타 창가 쪽만 바라봤다. 머지않아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 둘은 또 말없이 한참을 걸었다. 답답하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거지. 성종이 애꿎은 아랫입술만 깨물면서 자기 자신을 자책하고 있을 때, 성열이 갑자기 우뚝 멈춰섰다. 그에 성종은 놀란 듯한 얼굴로 덩달아 같이 멈춰섰다. 이내 성열이 말을 꺼냈다. "성종아." "…응?" "형 말이야, 좋아하는 사람 있어." 성열의 말에 성종은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좋아하는… 사람? 그런 건 생각조차 안해봤다. 그래서 더 충격이었다. 성열은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너는, 나한테 정말 정말 소중한 동생이야." "…형." "너 어렵게 태어난 건 들어서 알고 있지? 그래서 나한테는 니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해. 정말 정말… 아껴주고 싶어." "……." "그 마음, 그만 거둬주면 안될까? 형은 지금 그 애에 대한 마음만으로도 너무 벅차." 성열의 간곡한 애원에 성종은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 * * "…표정이 왜 그래?" "뭐가…." "…너 지금 나 안 보잖아." "……." 두준은 말없이 입술을 깨무는 자신의 연인을 바라보았다. 어렵게 얻은 사람이다. 정착했다고 믿었다. 늘 애정에 목마른 아이라서 제 품에 가두기까지 꽤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금방 흔들리는 녀석을 알기 때문에 그래도 기어이 뿌리 내리게 하려고 온 힘을 다했었다. 그런데, 저 눈. 오랜만이다. 꽤나. "…성규야." "……." "오빠가 너 많이 좋아해." "……." "오빠 화나면 무섭다. 알지?" "…어." 나는 너를 죽어도 놓지 않아. 내게서 너를 흔드는 녀석이 있다면, 난 용서 같은 거 안해. 알지?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녀석은 알 것이다. 바에서 입을 맞추는 순간 부드럽게 열리는 입술, 이 안의 황홀경은 저의 것이어야 한다. 온전한 내것이 된다 약속하기 전까지 꽤나 문란했던 녀석의 과거를 질책한 적 없었지만 '미래'는 다르다. 가만히 허리를 끌어 안으니 스르륵 딸려오는 몸이 부드럽게 제 곁에 엉켜 들었다. 마주 안아오는 가느다란 팔의 떨림은 조금씩 잦아든다. "…흔들리지마." "그런 거 없어." "…네 입술 다른 사람한테 주지마." 얼마나 예민하신지 금새 부풀어 오르는 입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마주치지 못하는 시선조차 저에게 거짓을 말하지는 못한다. 어려운 녀석이니만큼 한 번 마음이 열리면 이렇게도 솔직해진다. 이 모습,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기를. 지금 이 순간 나는 꽤나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 모양이었다. 녀석이 학교 선생이라는 직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 때문에 자유롭게 놓아주고 있을 뿐이다. 만약 네가 흔들린다면 미쳐버린 나는 네 세상에 간섭하게 될지도 몰라. 자유를 즐겨, 그 소중함을 잃어버리지마. 나를 놓지마. 성규야. 한참을 얽혀든 혀가 스륵 풀리며 네 눈은 검게 빛났다. 여전히 너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미안." "……." "나, 나약한 거에 좀 약하잖아." "…알지, 그 빌어먹을 동정심." 아, 동정심. 그래 그 감정이었어! 뭔가 깨달은 듯한 녀석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너는 여전히 내겐 아름다운 사랑이다. 변하지 않을. 아니 변하지 않아야 할, 사랑. 너를 위해, 너를 놓는 것 외의 모든 것을 해줄테니. 떠날 생각 하지마- 하니 녀석이 웃는다. 그럼 나 오늘 그거 줘.하고. "…뭘?" "토나올 정도로 섹시한 밤." 토 나올 정도로 섹시한 너란 놈이 옆에 있는데 도대체 뭘 더 해주란 거냐. 이 망할 여우새끼. * * * 도통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아 1층으로 내려왔다. 거실은 여전히 조용하기만 하다. 일하는 사람도 없는 휑한 집. 가끔 이집엔 우렁각시가 사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무서울 정도로 깨끗한 거실, 가식적인 가족사진. 얼음이 달그락 우는 소리가 들렸다. 외롭다. 그래서 김성규가, 보고 싶었다. 역시, 좋아한다니까. 나는. 당신을. * * * 다음 날 아침 소란스러운 교실의 분위기를 알려주기라도 하듯,수업 종이 치고도 계속 떠드는 아이들에 성열은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엠피쓰리에 들어있는 노래는 단 두곡뿐이었지만 성열은 개의치 않으며 볼륨을 더욱더 크게 올리며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적어도 옆에 있던 호원이 귀에 안좋다며 이어폰을 성열의 귀에서 빼기전까지는. "왜 빼.넌 나 방해하는게 취미냐?" "크게 듣는거 귀에 안좋아.너 평생 청각장애인으로 살고싶어?" 그러고 싶으면 계속 듣던가,비아냥 거리는 호원의 말투지만 괜히 설레는 이 가슴을 도저히 말릴수가 없다.지금 나 걱정해준건가? 분명 아까까지 오늘 아침에 말없이 나간 성종이를 걱정하던 자신이었건만 호원의 말한마디에 설레는 자신이 웃겼다.그런 변덕스러운 자신의 마음에 작게 코웃음을 친 성열이 이내 호원의 손에 있던 이어폰을 뺏어들었고 또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아 호원을 향하던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아,밖을 보아하니 집을 나설때만해도 햇빛도 쨍쨍하고 바람도 살살 불었던 하늘에서 여름비인지 비가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우산,안 가지고 왔는데.그렇게 한숨을 푹 쉬고 잭상에 얼굴을 묻었다.성종이는 가져갔을까.창 밖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자신의 마음을 대신해주는 것처럼 이 우중충한 기분은 전혀 가라앉지 않을것만 같았다 "한 숨 쉬면 땅 꺼진다" "뭐야,재미없어." "이게 아까부터 걱정해줘도 지랄이야.지랄은.됐다 됐어.난 동우형한테나 갈련다." 호원이의 웃음 섞인 목소리에 성열은 가지 말라며 잡을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동우형이 그렇게나 좋을까. 나한테도 좀…그렇게 웃어주면 좋을텐데. 등을 보이며 멀어져가는 호원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참으로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떡할까 난 이제 이 마음을 어떡해야 하지. 좀처럼 이 마음을 숨길수가 없어 자꾸만 호원을 피하게 되는 것이 자신을 점점 지치게 만들었다. 그 때문일까 이어폰을 따라 빗소리에 어울려 슬프게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더욱 더 성열이의 가슴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 * * 저건 또 오늘 왜 저렇게 저기압이야? 이전보다 학교에 일찍 등교한 성종은 잔뜩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우현은 왠지 섣불리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저렇게까지 어두운 모습은 처음 봤다. 아이 씨, 궁금해 미치겠네. 그렇게 성종이 앉은 자리만 힐끗힐끗 쳐다보던 우현은 마침내 쉬는 시간이 되자 바로 성종의 자리로 가 그 옆에 앉았다. "야, 너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냐? 왜 세상 불행 다 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 "니가 알 거 없어." "뭐?" "니가 알 거 없다고!" 고개를 팍 들면서 소리를 지르자 우현은 한소리를 하려다가 정면에서 보는 성종의 얼굴을 보고 말을 잃었다. 뭐야, 눈 왜 이렇게 퉁퉁 부은 거야?! "야, 너 눈깔이 왜 그 모양이야? 완전 붕어 눈깔 다 됐네." "넌 말을 해도 좀 더 순화시켜서 하면 안돼?" "내가 먼저 물었잖아! 눈깔이 왜 그 모양이냐고!" "보면 몰라? 울었으니까 눈깔이 이 모양 이 꼴이지!!" 자꾸 저를 보채는 것이 짜증나서 성종은 빽, 하고 소리를 지른 뒤 그대로 책상 위에 엎어져 버렸다. 울었다라, 얘가 울만한 이유가… 우현의 입가에는 이내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이성열 때문이냐? 너 운거." "……." "작작 좀 해라 진짜, 너만 힘들잖아! 넌 왜 그렇게 니 자신을 자학하지 못해서 안달이야?" "…람이 있대." "뭐?" "좋아하는 사람… 있대. 형이, 그랬어. 자기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엎드린 상태에서 웅얼거리듯이 말하는 게 잘 안 들렸지만 우현은 최대한 귀를 활짝 열고 성종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좋아하는 사람? 얼씨구, 형제가 아주 잘하는 짓들이다. "내 맘… 그만둬주면 안되겠냐고 그러더라." "……." "근데 이게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이게 몇년을 키워온 마음인데 어떻게 그걸 쉽게 뜯어낼 수 있냐고…." 또 우는 모양인지 성종이 어깨를 들썩거렸다. 우현은 아랫입술을 깨물다가 이내 성종의 등을 손으로 쓸어내려주었다. 제 등을 따스하게 쓸어내리는 손길에 성종이 눈물범벅인 채로 고개를 들어 우현을 바라봤다. "울지 마." "……." "내 앞에서 그 자식 생각하면서 울지 말라고, 돌아버릴 것 같으니까." 우현의 말에 성종은 눈을 꿈뻑거리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왜… 니가 돌아버리는데?" 성종의 말에 우현은 한참을 뜸들이다가 이내 왼쪽 가슴을 손으로 치면서 대답했다. "몰라, 근데… 여기가 존나 아프거든. 너 때문에." "……." "너 처음 봤을 때부터 쭉 아팠어… 여기가." 우현의 말에 성종은 당황한 표정으로 뭐라 말하지 못했다. 뭐지? 얘 지금 나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성종이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우현은 한숨을 내쉬면서 도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성종은 선생님이 들어올 때까지 멍하니 우현만 쳐다봤다. 알 수가 없다, 정말로. * * * 선생이라는 주제에 저렇게 티를 내고 다녀도 되는 것인지. 복도를 걷던 명수는 멀리가 다가오는 성규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 정확이는 그의 목에 남은 붉은 자국을 보며. "씨발." 욕짓거리가 튀어 나왔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는데, 왜 마음은 거두어 지지 않는 것인지. 왜 더욱 욕심이 나는 건지. 지랄맞은 아이러니함에 입술을 깨물며 걸음을 옮겼다. 둘이 스쳐지나가고 명수는 비릿한 미소와 함께 말을 흘렸다. "뜨거운 밤 보내신거, 자랑하십니까." "…뭐?" "아닙니다." 짧은 찰나, 차가운 기운이 맴도는 대화가 지나가고 이미 지나쳐버린 명수의 뒷모습을 보며 성규는 헛웃음을 지었다. 생각할 수록 기분이 나빴다. 두준이의 말에 의해 깨닫게 된 어떤 동정심. 녀석을 향한 일말의 동정심마저 사그라 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성규는 들고있던 출석부를 세게 쥐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 명수에게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둘의 간격이 좁아지고 성규는 명수의 어깨를 잡아챘다. 구겨진 교복과 그만큼 구겨진 명수의 미간. 성규는 사나운 눈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야, 너 나 좋아하지 마." "네?" "그딴식으로 좋아 할 거면 좋아하지 말라고!" "언성 높히지 마세요. 여기 학교입니다." "너 진짜 지친다. 무섭기까지 해. 언제 그 가면 벗을거야? 영원히 벗지 않을 생각인가?" 악에 바쳐 목소리를 높히는 성규가 제 눈에는 귀여웠는지, 명수는 피식, 하고 웃을 뿐이었다. 어이가 없어. 나지막한 성규의 목소리에 명수는 상체를 숙여 그의 귀 가까이로 입을 가져갔다. 다가오는 명수의 얼굴과 진해져오는 녀석의 체취. 성규는 숨을 들이 마신 채 내쉬지를 못했다. 작은 공간을 사이에 두고 맞닿은 두 볼. 귓가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명수의 숨에 성규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제가 어떤 식으로 명수에게 화살을 돌리든, 결국 다치는 건 본인이라고 깨닫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말했잖아요. 선생님 화내는 것도 내 눈에는 예뻐 보인다고." 동정심? 두준의 말에 의심이 가고 있었다. * * * 종이 치자마자 서둘러 반을 나서는 성종의 모습에 우현이 신경질을 내며 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아씨, 거기서 그 이야기는 또 왜해가지고. 제 말에 당황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어버버 거리기만 하던 성종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와중에도 놀라서 커진 두 눈을 보고 가슴이 간질거렸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한숨만 푹푹 쉬어대던 우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제게로 꽂힌 시선을 느끼고선 고개를 슬쩍 들어올렸다. 왜, 뭐. 뭐보는데. 잔뜩 가시가 돋힌 말투에 그에게 꽂혀 있던 시선이 제각기로 흝어졌다. 아, 미치겠네. 우현이 마른 세수를 하며 교실을 나섰다. 아무래도 오늘은 성종의 얼굴을 보기도, 학교에 있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어째서 제가 그 상황에서 성종에게 그런 소리를 나도 모르게 했는지, 왜 내가 그런 마음을 가졌는지. * * * 점심시간전까지 보이던 우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또 무단조퇴 한건가? 저러다 학교에서 짤리면 어떡하려고. 성종이 혀를 끌끌 차며 교복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우현의 번호로 문자 메세지를 작성하던 성종은 제 모습을 자각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지금 뭐하는거지? 그 녀석이 무단조퇴 하던 말던 신경쓸거 없잖아. [몰라, 근데… 여기가 존나 아프거든. 너 때문에.] [너 처음 봤을 때부터 쭉 아팠어… 여기가.] 문득 조금전에 우현이 제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성종의 눈이 번뜩였다. 그래 이제야 생각이 났다. 어디서 들어본 말인가 싶더니 저 대사는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이 했던 말이잖아! 이럴줄 알았어, 내가 그 자식 때문에 얼마나 신경이 쓰였는지…. 우현이 저를 골려주기 위해 드라마에서 나오는 대사를 써먹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람 놀려 먹는것도 정말 가지가지다. 성종은 피식, 웃으며 주머니에 넣었던 핸드폰을 도로 꺼내 들고 카톡에 접속했다. 아, 맞다. 남우현 스마트폰 아니지. 아차 싶은 성종이 일반 메세지로 문자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 너 아까 나한테 처음 봤을 때부터 쭉 아팠어, 어쩌고 저쩌고 했던거 드라마 대사 맞지? ] 전송 버튼을 누른 성종은 문제집으로 시선을 돌리고 마저 풀기 시작했다. 수학 문제를 하나 풀고나니 핸드폰 진동이 울려왔다. 우현에게서 답장이 왔다. [ 미친년 너 무당이냐? 어찌 알았냐? 드라마좀 작작봐라ㅉㅉㅉ -남우현-] 후우. 우현에게서 온 답장을 확인한 성종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럼 그렇지. 내가 대체 뭔 생각을 한거야. 남우현이 그럴리가 없잖아…. 그렇게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으려니 우현에게서 또 한통의 문자가 왔다. [ 너 설마 내가 아까 그런 대사 날려서 설레였냐?ㅡㅡ;; 난 남자한테 관심 없어 꿈깨 븅신아ㅗㅗㅗ -남우현- ] 개새끼. 남우현은 이래서 정을 줄수가 없다. 성종은 우현의 번호를 남우현에서 개새끼로 변경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한참이나 뾰루퉁한 표정을 짓던 성종은 이내 문제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드라마? 이 년 드라마 광인가? 근데 그런 대사가 나오는 드라마가 있었어?" 성종에게서 문자가 왔을 때 우현은 순간 뭔가 싶었다. 원체 드라마에 관심도 없고 해서 지금 어떤 드라마가 제일 인기있는지도 모르는 우현이었다. 그런데 드라마 대사라니… 처음에는 좌절했지만 이내 어색한 상황을 벗어나야겠단 생각에 일단은 그런 식으로 답장을 보냈다. 하아, 일단 한 고비는 넘겼네. 아니, 넘긴 게 아닌가? 에이 씨, 몰라!! "…어?" 원래 이 낮시간에는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이 보였다. 잔뜩 낡아 밑창이 떨어지기 일보 직전인 운동화 한 켤레, 그리고 마당에서부터 지독하게 풍겨져 오는 술냄새… 우현은 순간 무의식적으로 몸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한동안 들어오지 않아서 그나마 숨통을 트고 살았었다. 어디 노가다 하러 간다 해놓고 거의 두달동안 소식이 끊겼는데, 이렇게 불시에 돌아올 줄은…… 우현은 머지않아 거실에 주저앉아서 술을 병나발로 불고 있는 제 아버지와 맞닥뜨렸다. 제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그는 인상을 찡그리면서 위를 올려다봤다. 잔뜩 굳은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는 우현의 모습에 그는 낄낄낄 웃으면서 어깨를 들썩였다. 웃음소리가 기분나쁘다. "키키키키킥, 오랜만이다?" "……." "근데 너 이 새끼, 너 학교에 있을 시간 아냐? 이놈의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이 허구한 날 땡땡이야?! 1년 꿇고도 정신을 못 차렸어? 어?!" 벌떡 일어나서 저에게 윽박을 지르는 모습이 참으로 꼴사나웠다. 속으로는 무척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이제 이 남자보다 자기가 더 크다는 생각에 애써 겁먹은 마음을 억누르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당신이나 정신차려, 그놈의 술 이제 지겹지도 않아? 나 같으면 존나 물려서 벌써 끊고도 남았겠다." "하, 뭐어? 이 건방진 게 지금 애비한테 뭐?! 그리고 너 아까 뭐라고 했어! 당신? 내가 남이야?" "싸지르기만 하면 다 부몬줄 알아? 난 지금까지 당신을 아버지라고 생각한 적 단 한번도 없어!" "오호, 네놈이 이제 좀 컸다고 나한테 대드는 거냐? 이런 개새끼가!!" 퍽, 그리고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우현의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그의 손에 들린 소주병은 이제 주둥아리 부분만 남아있었다. 맞은 부위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왜 살아? 그렇게 술만 죽도록 마실 거면 차라리 그냥 나가 뒤지지 그래?" "이, 이, 이 놈이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제 배를 차는 거센 발길질에 우현이 뒤로 나자빠졌고, 그대로 제 몸 위로 가해지는 폭력을 받아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는 예전처럼 더 이상 맞기만 하는 나약한 우현이 아니었다. 우현은 있는 힘껏 제 아비를 밀어낸 뒤 그대로 집을 뛰쳐나갔다. 이 거지같은 인생, 나야말로 대체 왜 사냐? 자조적인 웃음을 내뱉었다. 이성종… 보고 싶다. * * * 자꾸만 저를 혼란스럽게 하는 명수를 피하고 싶었다. 마침 우현이 또 학교를 무단조퇴 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면담을 핑계 삼아 학교를 빠져나온 성규는 숨을 가쁘게 내쉬며 끝도 없이 이어진 계단을 올려다 보았다. 뭐가 이렇게 높은건지 가도가도 끝이 없다. 집은 또 이렇게 비슷하게 생긴건지. 하도 꽉 쥐고 있었던 탓에 꾸깃꾸깃해진 종이를 펼친 성규가 한숨을 내뱉었다. 도대체 어디가 남우현의 집이라는거지.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위태로웠다. " …아, 몰라. 전화를 해야되나. " 결국엔 몇걸음 가지않고 자리에 멈추어선 성규가 계단에 털썩 주저 앉으며 손으로 부채질을 해댔다. 햇빛은 왜 이렇게 강한건지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다. 그늘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던 성규가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큰 소리에 깜짝 놀라 시선을 뒤로 돌렸다. 우현이 빠르게 집을 나서고있었다. 성규가 몸을 일으켜 우현의 뒤를 쫓았다. 야, 남우현! 인상을 찌푸리고선 겨우 따라잡은 우현의 손을 잡은 성규가 그의 손에 묻은 핏자국을 보고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그제서야 우현의 와이셔츠을 헝건히 적신 피가 이마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현이 갑자기 성규의 손을 뿌리치더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 남우…, 남우현! " 우현이 정신을 잃고 그대로 쓰러졌다. * * * "예? 가셨… 다고요?" "어어, 거 남우현이 면담인가 뭔가 해야겠다고 가던데? 쯧, 하여튼 그 놈이 여러 선생들 애 먹인다니까? 그래도 김 선생이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주는 걸 보니까 김 선생이 남우현을 좀 많이 생각해 주는 것 같기도 하고……." 교무실에 가 명수를 찾으니 이미 가고 없단다. 우현의 면담을 해야겠다면서 먼저 가버렸다나 뭐라나… 명수는 성규의 행방에 대해 알려준 선생에게 인사를 한 뒤 그대로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하여튼 그 문제아는 여러 사람 애를 먹인다. 우현의 가정사정을 알 리 없는 명수는 속으로 우현을 신랄하게 깠고, 이내 폰을 꺼내들어 성규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받지를 않는다. 뭐야, 왜 안 받아? 짜증이 났다. 몇번을 해봤지만 결국 받지를 않았다. 그렇게 허한 마음을 이끌고 하교를 하는데, 앞에 왠지 모를 익숙한 차가 한대 서 있었다. 이 차, 어디서 본 적이 있다. 게다가 차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전형적인 훈남이라고 해도 될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명수는 그 남자를 기억했다. 성규와 키스를 했던…… 그 남자다. "어어, 학생. 혹시 김성규 선생님 못 봤어? 내가 그 선생님 친군데 연락을 안 받아서 말야." 그때, 두준이 먼저 명수 쪽으로 다가와 성규에 대해 물었고 명수는 비릿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쪽이에요?" "어? 뭐가?" "김성규 이거." 새끼손가락을 든 채로 까딱거리자 두준의 표정이 잠시 굳어진다. 그러나 바로 웃는 얼굴로 돌아온다. 이 녀석이구만, 김성규한테 들이댄다던 그 놈이. "아아, 네가 바로 그 녀석이구나? 김성규 좋다고 쫓아다니는 어린 놈이." "…김성규가 그렇게 얘기하던가요?" "어허! 학생이 선생님한테 반말하면 쓰나!" 짐짓 엄한 표정을 하면서 장난스레 호통을 치자 명수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진다. 역시, 애는 애구만. 뭐, 김성규는 오늘 못볼 것 같으니……. "일단 통성명부터 하지, 난 윤두준이라고 해." "…김명수입니다." "우리, 어디 한적한 곳으로 가서 얘기나 할까?" 김성규를 사이에 둔 남자 대 남자로서 말이야. * * * "…으윽!" 쓰린 이마를 부여잡고 천천히 눈을 떴다. 지독한 병원 냄새가 코 끝을 마구 찔러오는 게 느껴졌다. 우현이 누워있는 곳은 다름아닌 응급실이었다. 그리고 옆에는 성규가 앉아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동네에서 본 기억이 있다. 성규는 계속 걸려오는 전화들을 받지 않다가 좀전에 아예 꺼버렸다. 짜증나게… 우현이 눈을 다 뜨자 성규가 말을 걸어왔다. "괜찮아?" "……." "그거, 혹시 너희 아버지한테 맞은 거니?" "…선생님이 알아서 뭐하시게요?" 우현이 까칠하게 대답하자 성규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못 미더워하는 건가. 아니, 일단은 그게 문제가 아니지. "너 오늘 갈 곳은 있어?" "없으면 어쩔 건데요?" "그럼 선생님 집에 가자." 뭐? 성규의 말에 우현은 놀란 얼굴을 했다. 이 인간이…?! * * * "…내가 당신과 이야기를 해야 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딱 세가지만 제시해 보시죠." 만만치 않은 녀석일세- 하며 두준은 웃었다. 가라앉은 눈동자는 어떠한 동요도 없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딱 10초쯤이 지났을 때 녀석은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김성규." "……." "…그 이름이면 충분하지 않나?" 네가 감히 내 것을 탐내고 있는 놈이라면, 내가 널 보는데 자격이 필요하진 않을텐데 말이야. 걸음을 멈춘 녀석이 뒤를 돌아본다. 여전히 동요없는 눈동자가 저를 보고 있었다.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는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녀석의 대답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졌다. "…뭐?" "…댁이 김성규도 아니고, 내가 김성규라는 이름에 강아지 새끼처럼 당신 따라 꼬리치며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당돌한 녀석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단 강적. 팔짱을 낀 채로 녀석을 위아래로 훑었다. 김명수. 단정하게 각잡혀 달려있는 명찰에 적힌 이름을 다시 한 번 낮게 읽어보았다. 녀석은 조금의 감정 변화도 보이지 않고 저의 눈을 당당하게 마주하고 있었다. "…고딩의 고백정도로 따로 만나 협박이라도 하고 싶을만큼 불안하다면." "……." "…두 사람의 사이는 뻔하군요." 낮고 느린 목소리가 꽤나 선명하게 저를 자극하고 든다. "한 쪽의 일방적 애정이거나." "……." "…단순한 섹스파트너 정도 이거나." 녀석은 그 말을 남기고 그대로 돌아섰다. 당장 돌려세워 저 개소리를 짖어대는 입을 찢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지만 참기로 했다. 저도 모르게 터져버린 웃음이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저런 고딩이란 말이지. 김성규를 흔든 게. "…그럼 왠만하면 페어플레이하자고." "……." "버림받은 불쌍한 개새끼 코스프레해서 애한테 괜한 동정 사지 말고." "……." 그대로 차에 몸을 실었다. 만만치 않은 녀석이네 김성규. 어디서 저런 걸 후려가지고.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는다. 이 여우야, 요망한 새끼야. 내가 지금 니가 존나 보고 싶으니까. 당장 전화받아. "……." 나 지금, 솔직하게 조금 많이 불안해지고 있으니까 말이야. * * * 응급실에서 나온 뒤 우현은 성규를 따라갔다. 거절할까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딱히 갈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제까지 아버지가 돌아온 이후 집을 뛰쳐나올때면 항상 길거리를 전전하면서 밤을 새거나 지하철역에서 몸을 누이곤 했었다. 새삼스레 지난 생각이 나자 우현은 힘없이 웃었다. 그리고 성규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내부에 입이 떡 벌어졌다. 헐, 우리 집의 몇배다. 교사가 이렇게 잘 살 수가 있는 거야? "이불 꺼내줄 테니까 소파에서 자지 말고 바닥에 이불 깔고 자. 알았지?" "……." "어차피 내일은 놀토니까 학교 걱정은 할 필요 없겠네, 그거 이마에 붙인 건 2주 후에 떼는 거야." "…네." "밥은 먹었어?" "아뇨." "반찬만 하면 되니까 좀만 기다려, 거기 앉아서 TV 봐." 성규가 소파를 가리키자 우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성규를 바라보다 이내 소파에 앉았다. TV를 키고 나서 한참을 뚫어져라 보다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성종에게 문자를 보냈다. 「 뭐하냐? 」 「 숙제한다, 왜? - 이성종 」 왠지 저절로 음성지원이 되는 것 같아 우현은 피식 웃었다. 이제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다. 반대쪽에 있는 부엌에선 성규가 앞치마를 둘러메고선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반찬을 다 하고 식탁 위에 올려놓을 즈음에 이제 켜도 될 것 같다는 생각에 폰을 꺼내들어 전원을 켰다. 그러자 부재중 메시지와 통화가 수도 없이 뜨기 시작했다. 낮에는 김명수, 그리고 오후에서 밤까지는 윤두준… 그때, 두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성규는 우현에게 와서 밥 먹으라는 말을 하면서 부엌을 나서 방으로 들어간 후에 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 왜?" - 왜? 지금 왜라는 말이 나와? 어쩐지 조금 격양되어 있는 목소리다. 화났나? "왜 그래?" - …하아, 오늘 학교 밖에서 기다렸는데 안 나오더라? "미안, 조금 일찍 퇴근했어." - 나 말이야, 그 녀석 만났어. "누구?" - 김명수, 너 건드리는 좆고딩. 명수의 이름이 두준에게서 나오자 성규는 철렁,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둘이… 만났다고? - 허, 존나 만만하지 않은 놈이더라? 말 받아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더라고 "……." - 김성규, 이거 하나만 확실하게 해두자. "…어?" - 나 사랑하지? "……." - 김성규한텐, 윤두준밖에 없는 거지? 마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듯이, 두준은 그렇게 성규를 보챘다. 성규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간신히 대답했다. "당연한 걸… 왜 물어?" - …그럼 다행이고, 그럼 오늘 너네 집에 가도 돼? "안돼, 손님 와 있어. 오늘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 - …그래? 알았어, 그럼 내일 영화나 보러 가자. 오전 10시 걸로 끊어놓을게. "응, 끊어." 그대로 통화를 마친 성규는 한숨을 깊게 내쉬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두준아, 어쩌지? 나도 이제 내 마음이 뭔지 잘 모르겠어. * * * 이불위에 누운 우현은 멍하니 불꺼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눈 앞으로 성종의 얼굴이 아른거리는 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고개를 저으며 애써 합리화를 시켰다. 오늘은 녀석을 얼마 못 괴롭혀서 그런 걸거야. 작게 고개를 끄덕인 우현은 옆으로 돌아누웠다. 답장이 없길래 잘자라고 문자를 보내 놓았는데, 그게 또 설레는 거다. 설레? 왜? "아, 미치겠네." 왜 자꾸 성종을 보면 괴롭히고 싶은지. 그리고서는 늘 미안해 하는 건지. 저도 제 자신을 모르겠어서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으로 성열과 성종의 얼굴이 겹쳐졌다. 두녀석이 형제라는 것과, 성종은 제 형인 성열을 좋아한다는 것. 성열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했던가. 이리저리 둥둥 떠다니던 생각들이 한꺼번에 제 머리위로 쏟아져 정신이 없던 우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자꾸 신경이 쓰이지. 얇고 하얗던 그 녀석이 왜 자꾸 눈에 들어오냐는 거다. 정말 괴롭히는 것만으로 기쁨을 느끼는 걸까. 그전에 내가 그렇게 잔인한 놈이였던가. "내가…왜 일진이지." 일진? 그것의 정의가 무엇인가. 나같은 불우한 환경과 깡. 그리고 주먹만 가지고 잇다면 모두가 일진이라는 푯말을 달 수 있는건가. 비릿하게 웃던 우현의 눈가에 반짝이는 어느 빛. 우현은 눈을 감았다. 제 처지가 이렇게 슬프게 다가오기는 처음이었다. 지하철에서 몸을 뉘일때도 이렇게 슬프진 않았는데. 헛웃음이 나와서 그냥 웃어버렸다. 그와중에 성종의 밝은 웃음이 보고 싶다 느낀 저에게서 화들짝 놀라 감은 눈을 크게 떴다. 떨고 있는 내 심장아. 뭐라고 말 좀 해줘. "내가 느끼는 이 모든 게 대체 뭔지를 말이야." * * * 성종은 휴대폰을 내려두고선 조심스레 거실로 나왔다. 소파 위에 누워 개그 프로그램을 보는 성열을 힐끔 바라보고선 그 앞에 털썩 주저앉는다. 성열이 너무 많이 웃는 바람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며 성종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어. 성종아. " 형. " " 응? " " 형이, 좋아한다던 사람…. 누구야? " 성열이 웃음을 멈추었다. 성종은 아무런 말도 없는 성열을 보고선 주먹을 꽉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 들어갈게. 잘자. 형. 성열은 성종이 방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우현은 여느 때와 같이 일찍 일어났다. 원래 아침잠이 그렇게 많지 않은 탓이었다. 하지만 일부러 늦장을 부려 맨날 지각을 하곤 했었다. 대충 고양이세수를 한 뒤 쪽지를 적은 뒤 그대로 바깥으로 나갔다. 「 덕분에 잘 먹고 잘 자다 갑니다. 」 집에 갈까 생각하다가 아직 아버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현은 발길을 돌려 학교 근처로 향했다. 운동장을 걸으면서 시간을 죽이던 우현은 다시 교문을 지나쳐 학교를 나와 목적지 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 인간은 언제쯤 또 내 앞에서 사라져 줄까. 아니, 차라리 그냥 콱 죽어버렸음 좋겠는데. 뭐, 그렇다고 내가 직접 죽이고 싶단 건 아니고. 그런 생각을 아예 안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지만, 안 그래도 막장인생인데 살인죄까지 저질러서 호적에 빨간 줄까지 긋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그 정도로 정신을 놓아버린 놈은 아니란 말이지. 어제 왼쪽 이마 부근에서 흘린 피 때문에 교복 와이셔츠를 못 입게 되어서 대신 성규가 선뜻 내어준 라운드넥의 셔츠에 교복 바지를 입은 채로 하염없이 걸었다. 아, 근데 다른 셔츠 한장은 집에 있는데 어떡하지? 진짜 짜증난다. 그렇게 아무 이유없이 걷던 우현은, 때마침 맞은 편에서 걸어오는 성종과 맞닥뜨렸다. "…어?" 우현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고 성종 역시 놀란 얼굴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어딜 가는 모양인지 제대로 차려입은 모양새가 제법 예뻐 보였다. 젠장. 예뻐 보인다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런데 성종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해있다. 우현은 뭐지, 하고 생각하다가 이내 그 시선이 다친 제 이마에 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썅, 이런 꼴로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는데!! "너… 누구랑 싸웠어?" …싸웠다라. 하긴, 학교에서 내 이미지가 그러니 이성종 입장에선 당연히 나올 법한 말이긴 했다. 그러나 그 말은 우현에게 내심 상처로 다가왔고, 이내 어이없다는 듯이 웃자 성종이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됐다, 여기서 무슨 얘기를 더해. 우현은 대충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아니거든?" 그리고 그대로 가려는데 성종이 제 팔을 붙잡아왔다. 뭐야, 왜? "뭐야?" "싸운 거 아님 왜 그 모양인데?" "그건 니가 알 거 없고." "남우현." "니가 언제부터 날 그렇게 걱정했냐? 너한테는 이성열밖에 안 보이는 거 아니었어?" 우현이 격양된 말투로 마구 쏘아붙이자 성종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면서 우현을 노려봤다. 하, 지가 뭔데 노려봐? 우현은 제 팔을 꽉 잡고 있는 성종의 손을 떼어내면서 대답했다. "아버지란 작자한테 소주병으로 맞아서 이렇게 됐다. 왜?" "…뭐?" "이제 궁금증 풀렸지? 그만 간다." 우현은 그대로 뒤돌아서 가버렸고, 성종은 새파랗게 질린 안색을 하면서 우현이 가는 걸 멍하니 바라봤다.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 * * "호야, 호야!" "네?" "으히, 그냥 불러봤어. 좋아서!" 그렇게 제가 좋아요? 장난스레 되묻는 호원에 동우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응응 호야가 제일 좋지. 호야도 나 좋아하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낸 동우가 호원을 바라보았다. 당연하죠. 작게 대답한 호원이 동우의 머리칼을 흐트렸다. "……." 성종보다 더 일찍 등교한 성열은 책상에 엎드려 호원과 동우의 애정행각을 지켜보고있었다. 문득 어젯밤 성종이 자신에게 물었던 말이 생각났다. 형이, 좋아한다던 사람…. 누구야? 」 성열은 쓰게 웃었다. 형제는 닮는다더니… 성종아, 우린 왜 이렇게 바보같을까? * * * 성종은 가슴에 무언가 얹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 우현의 저에게 했던 말이 아직까지도 뇌리에 박혀 있었다. 아버지한테 소주병으로 맞았다니, 그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야? 곰곰이 생각하던 성종은 이내 우현의 가정환경이 그리 넉넉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운동화는 거의 낡아빠졌고 폰도 요즘 애들은 쓰지도 않은 2G 폰이었지. 성종은 우현이 앉은 자리를 힐끗거리면서 쳐다봤다. 우현은 여전히 이마에 반창고를 붙인 채였다. 그러나 그런 우현을 신경쓰는 이는 성종 외엔 아무도 없었다. 애가 저렇게 크게 다쳤는데 왜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거지? 아무리 우현이 날고 기는 일진이라지만 저렇게 큰 상처마저 당연하게 여겨져야 하는 건 아니잖아…… 괜히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제가 나선다고 우현을 걱정해줄 아이들이 아니었다. 그저, 이어폰을 꽂고 자습서나 교과서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단 한번도 주위를 둘러보지 않은 채로 손을 바삐 움직일 뿐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내가 뭣 때문에 쟤를 걱정하는 거지? 쟤는 그동안 나를 엄청 괴롭혀 왔었잖아. 물론 최근 들어서 그 유치한 짓거리는 그만두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 신경을 건드리는 건 여전한데, 내가 대체 왜 저 녀석을 이렇게까지 걱정해야 하는 이유가 없잖아. 머릿속을 헤집는 복잡한 생각들에 성종은 도저히 자습서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성종은 종이 울릴 때까지 책상 위에 엎드려 있어야만 했다. 남우현 나빠, 대체 왜 이렇게까지 나를 신경쓰이게 하는 거냐고! 잠깐 바람이라도 쐬자는 생각에 성종은 교실 밖으로 나갔고, 네임펜으로 책상 위에 낙서를 하던 우현은 성종이 나가는 것을 보자마자 바로 따라나섰다. 뭐야, 그때는 나한테 그렇게 화내놓고 왜 따라오는 건데? 성종은 뒤를 홱 돌아보면서 우현에게 쏘아붙였다. "너 왜 나 따라와?" "나 너 따라오는 거 아닌데?" "거짓말 하지마!" "거짓말 아니거든? 이년이 누굴 바보로 아나." 적반하장으로 받아치는 모습에 성종은 기가 찼다. 하아, 진짜 말이 안 통하네. 됐어, 내가 쟤랑 대화를 더 해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대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우현이 뒤에서 저에게 말을 걸어왔다. "야, 이성종." "…왜?" "그거, 드라마 대사 아니야." 우현의 말에 성종은 눈을 크게 떴다. 대사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때 문자 보냈을 때에는 분명……. "나 드라마 안봐, 그런데 그냥 그 상황 모면하려고 구라친 거야." "…뭐야? 그럼 나한테 왜 그런 말을 했던 거야?!" 성종의 물음에 우현은 지난 주말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얻은 결론을 말했다. "…네가 좋아서 미쳐버리겠다." 말 한마디로 전해지는 그 진심이… 너무 컸다. * * * 명수가 성규를 빤히 바라보았고 성규도 그런 명수를 바라보았다.계단에서 마주친 그들 사이엔 고요한 정적만이 흘려 보지 않으면 누가 있는지조차 모를정도로 조용했다. 분명, 두준이를 만났다고 했는데 뭐라 따져야 할 이 상황 속에서 아무런 말이 없는 명수가 이상하다 못해 무엇인가 뜨끔하여 그냥 못 본 척 지나가려던 성규를 명수가 붙잡았다. "선생님한테는 제가 그냥 선생님 좋다고 졸졸 따라다니는 좆고딩입니까." "…어?" "물어보잖아요.내가 그냥 선생님 뒷꽁무니나 따라다니는 좆고딩밖에 안되냐고" 또 나왔다. 그 상처받았다는 눈빛. 뭐라 대답해야 할까. 사실 자신도 몰랐다. 명수가 그저 좆고딩밖에 안되는지. 아니면 정말로 명수가 두준이를 나중에 생각할만큼의 그런 존재인지는. 두준과 통화했던 어젯 밤까지만해도 흔들리지 말자 다짐했던 자신이었건만 명수의 눈빛을 보자 또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성규는 입술을 깨물으며 짧은 고민을 하였다. 자신을 좋아한다는 명수를 처음엔 선생님으로서 그저 안쓰럽다고 느꼈을 뿐이지만 지금은…. "…글쎄" 확실히 동정만은 아니었다. * * * ' 못 들은 걸로 할게…. ' 좀전 성종이 했던 말을 되새기던 우현은 제 머리를 헤집어놓으며 옆에 있던 의자를 있는 힘껏 발로 찼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복도에 가득 울려퍼지고, 제게 몰린 시선을 알아차린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욕을 읊조렸다. 마음 한 구석이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 * * 허겁지겁 옥상으로 올라온 성종이 자꾸만 뛰어대는 제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눈을 질끈 감고선 거친 숨을 내뱉는 그의 눈가에 눈물이 서서히 맺혀왔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미친듯이 뛰어왔다. 왜, 싫지 않았던건지. 성종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성열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환하게 웃는 성열의 모습 위로 우현이 제게 보여줬던 웃음이 겹쳐 보였다. 이게 뭐야…. 성종이 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 * * 혼자 길을 걷던 성열은 누군가 제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느낌에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뒤를 돌아보니 껄렁껄렁한 다른 학교 학생들 네다섯이 서있었다. 뭐야. 심드렁하게 뱉어낸 성열의 말에 학생들은 낄낄 거리며 웃었다. "야, 형이 지금 너무 급해서 그래. 돈 좀 있어?" "형들이랑 나눠 쓰자." 어깨를 살살 쓰다듬은 기분나쁜 손길에 성열은 매몰차게 그 손길을 쳐냈다. 너희 같은 새끼들한테 줄 돈 없어.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뱉어 낸 성열은 그대로 뒤를 돌아 가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기분이 상했는지 욕설과 함께 거세게 어깨가 잡혀 돌려졌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미간을 구긴채 성열은 불량스러운 그들을 노려 보았다. "어쭈, 노려보면 어쩔건데? 응? 여기 너 혼자야. 수적으로 좀 불리하다 생각안해? 뭐 로보트 태권 브이라도 되냐?" "놔." "돈 좀 나눠 쓰자는데 뭐 이렇게 말이 많아 그냥 내 놓으면 될것이지!" 남자의 발이 성열의 복부를 가격했다. 뒤로 넘어진 성열에게 순식간에 달라든 남자들은 인정사정 볼것없이 발길질을 해대고 있었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그들의 공격을 받아내던 성열은 아무 표정이 없었다. 무언가를 체념한 듯 한 표정. 야, 뭐야 새끼들아! 그때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성열아!" "씨발, 다 안꺼져? 거기서 단 일센치라도 내 친구 건들여봐. 아주 다 그냥 죽어?" "뭐야 이자식은. 어디서 정의의 용사가 납신거야?" 누군가의 목소리에 바닥에 누운 채 살짝 눈을 뜬 성열은 시야로 들어오는 호원과 동우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또 둘이 같이 있네. 기쁜 듯 슬픈 목소리였다. 비아냥 거리며 호원에게 다가간 남자의 얼굴이 보기좋게 돌아가고 뒤이어 달라든 두명의 남자도 배를 감싸쥐며 나가 떨어졌다. 호원의 뒤에서 벌벌 떨며 연신 '어떡해'만을 중얼거리던 동우는 쿨럭이는 성열을 보고는 쪼르르 달려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성열아! 괜찮아?" "쿨럭- 어떻게 알고 왔어요?" "지나가는 길에 누가 맞고 있길래 와봤어. 아프지?" "괜찮아요." "야, 그러게 너는 진작에 나랑 같이 합기도 다니자 그랬잖아." 호원의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피식 웃은 성열은 고개를 저었다. 자식아, 네가 나더러 멀대같은 게 더럽게 못한다고 놀렸잖아. 아픈 얼굴을 움직여 웃는 성열의 이마에 알밤을 놓은 호원은 혀를 찼다. 그리고는 저만치 도망가고 있는 불량학생 무리를 보며 침을 뱉었다. 꼭 별거 아닌 것들이 나대. "괜찮냐?" "응." "병원 갈래?" "아니야." "그래, 그럼." 관심 없는 듯 챙겨주는 호원의 모습에 쓰게 웃은 성열은 동우를 호원의 쪽으로 밀어냈다. 저 혼자 갈 수 잇어요. 위태로운 성열을 안타깝게 보는 동우에게 한번 웃어주고 호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고마워, 나 갈게. 애써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이 물기에 젖어 있었다. 짝사랑은, 어떤 식이든지 힘들고 아프다. * * * "어이, 남우현." 야자를 모두 끝마치고 그대로 가방을 메고 가려는데 뒤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에 우현이 멈춰선 채로 뒤를 돌아봤다. 성규였다. 거 참, 쩨쩨하게… 우현은 혀를 차면서 성규의 옷을 넣어둔 종이백을 가져다가 성규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옷도 잘 입었수다." "넌 선생님한테 말투가 그게 뭐냐? 짜식이…." "용건 없죠? 그럼 저는 이만…." "야야야야, 아직 안 끝났어." 아오, 또 뭐!! 우현이 짜증난단 얼굴로 뒤돌아서자 성규가 피식 웃으면서 까딱까딱 손가락을 움직였다. "일로 와, 나는 아직 볼일 남았으니까." "…썅!!" 대체 저한테 무슨 볼일이 남았다는 건지 우현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거역했다간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니란 걸 잘 알았기에 우현은 울며 겨자먹기로 성규를 따라 학교건물 밖을 나갔다. 성규는 등나무 그늘 아래에 있는 벤치에 앉았고 우현은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앉았다. 그러자 성규가 옆으로 와서 안 앉냐며 타박했고 우현은 궁시렁거리면서 마지못해 성규의 옆에 앉았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성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무리 그래도 함부로 결석하지 말고 중간에 학교 나가지 마라. 적어도 고졸은 되야 공장에라도 취직하지. 안 그래?" "……." "…아버지한테 많이 맞고 살아?" "자주는 아니고요, 그 인간이 가끔 길게 잠적탈 때가 있거든요? 나 중학교 때부턴가, 그때부터 어디 멀리 일하러 나간다 그러면서 한 몇달씩이나 집에 안 들어와요. 그럴 때는 내 세상이고, 그러다가 돌아오면 바로 아작나는거고. 존나 술독에 제대로 빠져가지고 아주 헤어나오지를 못해요." "……." "이제 그 인간보다 내가 더 큰데, 왜 아직도 그 인간 신발만 보면 그렇게 떨리는지… 존나 짜증나." "…지금도 집에 계셔?" "아뇨, 며칠간 어디 일하러 간다면서 또 나갔어요. 근데 이번에는 몇달이 아니라 며칠이라 한걸 보면…… 금방 오겠다 이거죠." 자조적인 웃음을 내뱉으면서 제 가정사에 대해 말하는 우현의 모습에 성규는 진심으로 우현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환경에서 계속 살게 내버려둔다면 졸업은커녕 제대로 학교생활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명색이 교사인데 엇나가려고 하는 학생을 바로잡아주려 하지 않는다는 건 절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 있음 선생님한테 다 얘기해, 알았지?" "내가 무슨 어린애에요? 그런 걸 다 얘기하게…." "너를 위해서야, 그러니까 선생님 말 들어." "…예." "데려다 줄까?" "됐어요." "그래? 그럼 선생님은 이만 가볼게." "네." 그렇게 성규가 벤치에 일어나서 차가 주차된 곳으로 가는 걸 바라보던 우현은 이내 정문 앞으로 가는 성종을 발견했다. 그러나 말을 걸 용기는 차마 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이성종." 너는 어째 밤에도 예쁘냐? * * * 성종은 정문 쪽으로 힘없이 걸으며 한참동안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 아까 전 자신이 좋다던 우현의 말에 당황하여 못 들은걸로 하자 하긴 했지만 자신 또한 짝사랑을 하고 있기에 내심 우현의 마음을 냉정하게 모른척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현이 누구한테도 사랑받지 못했다 생각하니 마음이 저려오는게 또 다시 코끝이 시큰거렸다.지금 느끼는 이 마음은 동정일까? 그저 남우현이 불쌍하고 안쓰러워서? 홀로 버스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며 부시시한 머리를 헤집었다. 자신은 아마 당분간 우현을 당당히 마주볼수 없을것이다. 적어도 이 마음을 동정이라 단정 짓기 전까지는 우현을 마주보지도 말을 걸지도 못하겠지. 어쩐지 가슴 깊은 곳이 조금 씁쓸해졌다. 짝사랑에다가 또 짝사랑이라 참 엿같아.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어느새 도착한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한산한 좌석에 앉는 동시에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 내일 아무렇지 않게 다시 보자.그럼 잘자 ] 아…짧은 탄성이 흘려나왔다. 남우현,그가 이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얼마나 생각하고 또 생각했는지가 전해져오는듯해 도저히 답장을 보낼수가 없었다. 물론 아무렇지 볼 자신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어떤 답장을 보내야 하는지조차 알수없었기에. '…네가 좋아서 미쳐버리겠다.' 그의 상처받은 얼굴이 떠올라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이성종, 정신차려. 남의 마음까지 돌볼 여유도 없는 주제에…. 아무리 딴 생각을 하려해도 계속 아른거리는 그의 얼굴에 결국 가방에 얼굴을 묻었다. 모르겠어,모두 다. * * * 퇴근 후에 자신의 집으로 오라는 두준의 연락을 받고서 성규는 바쁘게 걸음을 놀렸다. 목소리가 많이도 가라앉아 있었다. 화가 났나. 제가 눈에 거슬리게 할만한 일이 무엇이 있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교문을 나섰다. 마침 감독도 없고 해서 일찍이 학교를 나서는 성규를 누군가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그 사람한테 갑니까?" "……." 명수였다. 이 시간에 학교에 있지 않고 왜 교문 밖에 있는 것인지. 고백은 받은 사람이기 전에, 학교의 선생으로서 옳지 못한 일을 발견 했으니 꾸짖어야 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짐짓 무서운 얼굴로 팔짱을 끼고 선 성규는 명수의 이름을 무섭게 물렀다. "김명수. 왜 이 시간에 여기 있는거야?" 그런 성규가 귀엽다는 듯이 피식 웃은 명수는 손에 들린 상장을 펄럭였다. 수학 경시대회 상장 받고 오는 길입니다. 저만큼이나 단정하게 대답을 하고서 상장을 귀찮다는 듯이 반 접어버리는 명수를 보며 성규는 입을 벌렸다. 교무실에서 선생님들끼리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올해 수학 경시대회 대상도 어김없이 명수의 차지라며. 역시 전교 일등은 남다르다고 입이 마르고 닳도록 명수 칭찬을 했던 여선생님들을 떠올렸다. 성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수상 축하해. 일등이라며?" "일등이 별겁니까? 번거롭게 왔다갔다 해야해서 귀찮은데." 어이가 없는 명수의 대답헤 허 하고 숨을 뱉은 성규를 향해 명수는 손을 뻗었다. 놀란 성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 머리를 만지작 거리는 느낌이 들고는 곧이어 웃음기 가득한 명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그머니 눈을 뜬 성규는 명수가 만졌던 제 머리를 매만졌다. "머리에 뭐 묻었었습니다." "어? 아…." "무슨 기대라도 하신건가." "기, 기대는 무슨!" 괜히 발끈 하는 성규를 보며 코웃음을 친 명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가던 길 가보세요. 애인님이 많이 기다리시면 어떡합니까. 은근히 가시가 돋힌 것 같은 명수이 말에 성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나 집착같은 것을 보이던 명수가 이렇게 쉽게 두준에게 저를 보내다니. 영 탐탁치 않아서 지나치려는 명수의 팔을 붙잡았다. "왜 오늘은 이렇게 쉽게 보내?" "네?" "붙잡지도 않고 그냥 보내잖아." "싫습니까?" "어?" "좋아하지 말라고 바락바락 악을 쓰실 때는 언제고." "……." 전의 일이 생각나 얼굴을 붉힌 성규는 화들짝 놀라며 명수를 붙잡았던 손을 떨어트렸다. 그런 성규를 말없이 보다가 가만히 손을 잡아오는 명수. 놀란 성규가 명수를 올려다보자마자 부드럽게 입술이 와서 부딪혔다. 깊지 않은 키스. 쪽 하고 떨어진 명수의 입술에 성규는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그런 성규의 머리를 쓰다듬는 명수의 큰 손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거세어 지고 있었다. "그 정도의 참을성은 있습니다." "……." "김명수는 어린애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 * * 성열은 힘없이 걸어가 집에 도착했다. 현관에는 성종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부모님은 아직이다. 성열은 거실 서랍장에 있는 구급상자를 꺼내 아까 전 얻어맞아 까진 부위에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였다. 꼴이 참 우습게 됐네… 성열은 힘없이 웃었다. 그때, 방에 있던 성종이 나왔다. 더러워진 교복에 딱 봐도 누구한테 맞은 것처럼 보이는 얼굴에 성종이 바로 성열의 옆으로 와 앉으면서 사색이 된 얼굴로 말했다. "형, 이게 뭐야? 누구한테 맞았어?!" "…신경 쓰지마." "내가 어떻게 신경을 안 써!!" 그날 성종에게 고백을 받은 이후로 성열은 성종의 눈을 차마 똑바로 마주볼 수가 없었다. 저를 담는 동그란 눈동자에 담겨져 있는 그 감정들이 여실히 느껴져서, 비록 입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눈으로는 그 감정들이 다 느껴져서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지금 제 얼굴을 부여잡으면서 무슨 일이냐고 물으며 저를 바라보는 두 눈, 잠깐동안 마주한 그 눈에서는 여전히 저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느껴졌다. 성열은 바로 고개를 숙이고 성종의 손을 떨어뜨리면서 말했다. "그냥 굴러 넘어진 거니까 그렇게 걱정 안해도 돼." "형…." "그리고 너, 남우현 그 자식이랑 어울려 다니지 마. 그 자식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 괴롭히던 새끼야, 왜 갑자기 태도가 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여전히 그 자식 맘에 안 들어." 우현과 어울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그대로 일어나려는데, 성종이 여전히 앉은 채로 말을 꺼내자 그대로 멈춰섰다. "너무… 그렇게만 생각하지 마. 걔 알고 보면 그렇게까지 욕 먹을 정도로 나쁜 애 아니야." "…뭐?" "요즘 애들 다 스마트폰 쓰잖아, 근데 걔는 아직도 2G 폰이야. 뭐, 걔 집안사정이 가난한 건 웬만한 애들은 다 아니까 그렇게까지 놀라울 건 아니지. 근데… 내가 저번 주 토요일 날에 나갔다 왔잖아. 나 예전에 가르쳐 주시던 학습지 선생님 만나러. 근데 우연히 걔를 봤어. 그런데… 걔 이마에 이따만한 반창고가 붙여져 있었어. 내가 그거 왜 그러냐 그러니까 니가 알 거 없다 그러면서 화를 내다가 말해주더라. 자기 아버지한테 소주병으로 맞아서 그렇게 된 거래." "……." "걔 저번에 나 조퇴해서 집 가다가 열 때문에 쓰러졌을때 나 업고 약국에서 해열제랑 밴드 사다가 공원에서 물수건으로 내 이마에 얹어주고 자기가 때려서 까진 데다가 밴드 붙여줬어. 그러고는 약 먹으라고 신신당부까지 했고. 얘가 정말 나 징하게 괴롭혔던 새끼가 맞나 싶더라. 그리고 있잖아…… 걔가, 나 좋아한대. 내가 좋아서 미쳐버리겠대." 좋아… 한다고? 남우현이, 성종이를? 제 할말을 다 마친 성종은 그대로 일어나서 도로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성열은 허, 하고 힘없이 웃었다. 뭐 이렇게 엉키고 설켰지? 우리는 대체 언제쯤 환하게 웃을 수 있을까. 이 터널의 끝이라는 게… 있는 건가? * * * "야,이성열.오늘 숙제 있냐?" "몰라.힘들어" 책을 펴놓고있던 성열은 그 말만을 내뱉으며 엎어지듯 책에 얼굴을 묻었고 호원은 자신이 몸이 안좋아보이는것 알기라도 한듯 어디서 가져왔는지도 모를 담요를 가져와 저의 등을 덮어주었다. 미련한 놈 아프면 집에서 쉬지 왜 왔냐? 자신을 탓하는 말투에 무색하게 호원은 잔뜩 걱정이 된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것이 보였다. 너는, 너는 너무 쓸모없는 친절이 많아. 그래서 내가 울잖아. 자꾸 착각하게 되서. 그럴리가 없는데 혹시나 하게 되서. 성열은 작게 웃으며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파, 어제 성종이의 말에 머리가 아파와 새벽에 바람을 쐬러 나갔다온게 화근이었다. 사실 아직도까지도 믿겨지지가 않았다. 남우현이 성종이를, 하아…성종아, 우린 정말 왜 이렇게 된걸까. 깊게 한숨을 내쉬는 성열의 모습에 호원이 정말로 괜찮냐며 등을 토닥여왔고 그의 행동에 또다시 눈물이 나올것 같아 성열은 책상에 얼굴을 완전히 묻고 잠이 들기만을 기다렸다. 바보같은 놈. 진짜 바보같은 놈. 성열은 호원을 향하는 욕인지 아니면 자신을 향한 욕인지도 모른체 눈을 감으며 계속 중얼거렸다. 세상에서 제일 바보같은 놈. 미련한 놈. * * * 최근 들어서 성규는 두준이 눈에 띄게 불안해 한다는 것을 느꼈다. 저를 보는 눈빛에서 느껴지는 이유 모를 절박함과 이전보다 잦아진 연락 등이 그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진짜 내가 그 녀석한테 흔들린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윤두준을 그렇게 만든 내 자신부터 먼저 반성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쩌면 진짜로 흔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어쩌다가 이리 된 건지. 「 나 내일 일 때문에 일본으로 출장 가. 」 「 그래? 」 「 아마 일주일동안 한국에 없을 거야. 그동안… 내 생각만 해. 알았지? 」 성규의 입에서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에게나 제 몸을 내어주면서 방탕한 생활을 하며 방황했었던 저를 잡아준 이가 바로 두준이었다. 두준으로 인해 비로소 한 곳에만 정착해있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안정시키는지를 깨달았는데, 이제 와서 두준이 아닌 다른 이에게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정말 두준에게 못할 짓이었다. 게다가 그 상대가 제가 가르치는 학생이라는 게 더 문제였다. 그동안 만나왔던 이들은 연상 아님 동갑이었는데, 연하라도 미성년자는 상대도 안 했던 난데… 대체 김명수의 무엇이 나를 흔들리게 만들었는가. 머리가 아파왔다. 하지만, 이제부턴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다. 성규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 * * 점심시간, 성종은 저를 따르지 않는 우현을 보면서 의아함을 느끼다가 곧 어제의 일을 상기시켰다. 맞다, 쟤 어제 나한테 고백했지. 성종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면서 우현을 지나쳐 교실 밖을 나가 급식실로 향했다. 어김없이 제일 구석진 곳에 앉아 밥을 먹는데 제 앞으로 드리워진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어라? 여긴 아무도 안 앉는 곳인데……. "왕따같이 왜 구석진 곳에서 혼자 먹어? 존나 궁상맞아 보이게." 헐, 남우현이다. 성종은 입을 멍하니 벌린 채 우현을 바라봤다. 뭐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한테 아는 척도 안 했던 녀석이 왜… 성종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현은 태연스레 성종의 앞에 마주앉아 식판을 내려놓은 뒤 묵묵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성종은 겨우 멍해진 정신을 바로잡고 우현에게 말을 건넸다. "너 뭐야? 왜 내 앞에 와서 앉아?" "앉을 데가 여기밖에 없어서 그런다, 왜?" "……." "내 문자 까먹었냐? 내일 아무렇지 않게 다시 보자고 한 거." "그, 그렇지만 그게 어떻게 쉽게 돼!" "이게 어디서 까불어." 우현은 짐짓 엄한 표정을 하면서 검지손가락으로 성종의 이마를 밀었고, 성종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우현을 째려봤다. "씨이, 뭐야!" "내 맘이거든? 그리고, 너는 왜 이렇게 먹는 양이 적어? 그러니까 그 모양으로 빼짝 말랐지." 그러면서 제 몫을 성종 쪽으로 퍼주는 우현이다. 성종은 아무 말도 못했다. "많이 쳐먹어, 이년아." 말은 험하게 하면서 표정은 참 아련하다. 아이러니가 따로없네. * * * " 뭐하자는거야? " 성종은 눈을 두어번 껌뻑이며 우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 뭐긴 뭐야, 아까 너가 내 급식 먹어서 배고파 뒈지겠으니까 먹을것좀 쏴. " " 뭐라고? 야, 니가 먹으라고 줘놓고 그게 뭔 소리야! " 하, 성종은 어이가 없어 기가 찰 지경이었다. 점심을 먹자마자 제 팔목을 붙들고 다짜고짜 매점으로 끌고 오더니 이상한 핑계를 대며 먹을거리를 사달랜다. 하하. 너무 어처구니 없는 일을 겪으면 웃음이 나온다는 말이 정말이구나. 이런 성종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현은 능청스런 표정을 지으며 먹을거리들을 잔뜩 골라 들고 성종의 눈 앞에 들이 밀었다. " 이걸 다 먹겠다고? " " 왜 돈 아깝냐? " 돈이 아깝냐 빈정거리는 말에 괜히 속이 상한 성종은 제 지갑을 우현에게 내밀면서 소리질렀다. "그래! 너 먹고 싶은 거 맘껏 사먹어!!!" 그리고는 홱, 하고 돌아서 버린다. 헐, 내가 좀 심했나? 우현은 머쓱한 듯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성종이 제게 내민 지갑을 바라봤다. 심플한 검정색의 브랜드 지갑이다. 집 잘 사나? 하긴, 그 정도 고층 아파트에 거주할 정도면 못 사는 정도는 아니겠지. 지갑을 열어보니 만원권 지폐가 다섯 장 정도 들어있었다. 헐, 이게 대체 얼마만에 보는 세종대왕님이냐!! 우현의 눈이 절로 동그랗게 떠졌고 입은 떡 벌어졌다. 그러나 성종이 보유하고 있는 액수에 놀라는 것도 잠시, 이대로 성종과 사이가 틀어질 수는 없다는 생각에 우현은 급히 문자를 날렸다. 「 야, 이성종. 내가 잘못했으니까 다시 돌아와. 」 비싼 지갑 아까운 줄 알면 알아서 다시 돌아오겠지. 우현은 빈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머지않아 성종이 다시 매점 안으로 들어왔고, 우현은 여전히 저를 째려보는 성종의 매서운 눈빛에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렇게 꼬라본다고 누가 무서워할 줄 알고? "뭐야?" "니가 사는 거니까 가서 돈내고 와." 이거 들고 가서, 우현이 제가 양껏 들고 온 군것질거리들을 가리키면서 얄밉게 말하자 성종의 표정이 다시 일그러진다. 어어, 이러다가 또 나가는 거 아냐? 마음이 조급해진 우현은 황급히 제가 들고 온 군것질거리들을 들고 줄을 서면서 성종에게 소리쳤다. "알았어! 내가 들거니까 계산이나 좀 해!!" "……." "뭘 멀뚱히 보고만 서 있어? 안 와?!" 내가 저런 놈을 잠시나마 동정했던 게 큰 잘못이다. 성종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하면서 우현의 옆으로 가 섰다. 줄이 짧아지고 차례가 다가오자 우현은 카운터에 제가 고른 군것질거리들을 올려놓았고 성종은 현금으로 계산을 했다. 매점을 나온 우현의 손에는 꽤 큰 비닐봉지가 들려져 있었다. 성종의 표정은 여전히 풀어지지 않은 채였다. "니 돈 쓴게 그렇게 아깝냐? 그럼 어떡해! 내가 돈이 없는데!" "누가 뭐래?" "니 표정이 지금 완전 똥 씹은 표정이잖아. 인상 안 풀어?" "…지가 나한테 퍼줬으면서 왜 쏘라 마라야?" "왜~ 지갑 보니까 세종대왕님이 많이 계시던데." "…됐어, 내가 너랑 무슨 말을 더 해?" 머리만 더 아프지, 성종은 주먹을 꽉 쥐면서 그대로 우현의 앞에 서서 빠르게 걸어갔다. 어쩜 승질 내는 것도 저렇게 이쁠까? 우현은 킥킥 웃으면서 성종에게 문자를 보냈다. 「 넌 존나 성질을 내도 어쩜 그렇게 이쁘냐? ㅋㅋㅋ 확 뽀뽀해버릴까보다. 」 우현의 문자를 받은 성종의 표정은 좀전보다 더 일그러졌고, 이내 확 뒤돌아서서 우현에게 도로 걸어간 성종은 발을 들어 우현의 안쪽 허벅지를 세게 차버렸다. "으억!!!" 그대로 주저앉은 우현을 뒤로 하고 성종은 씩씩거리면서 걸어갔다. * * * "야- 이호원." "왜 임마."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조금은 충동적인 고백이라고 생각했다. 저와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씹어 삼키면서도 쉴새 없이 동우와 연락을 하는 호원의 이목을 끌기 위함이었다. 예상대로 호원은 덤덤한 표정으로 신발코로 바닥을 긁는 성열을 멍하니 바라봤다. 뭐? 살짝 장난기가 묻은 목소리가 되묻는다. 성열은 흘끔, 호원의 표정을 곁눈질하고 몰래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최대한 덤덤해 보이기 위해 목소리를 눌러내렸는데- 그게 통한 모양이다.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고." "어떤 여잔데? 우리 반?" "...응 우리 반." 여잔 아니지만. 성열은 목울대를 칠것 처럼 아슬아슬 하게 울렁거리는 속내를 애써 꾹꾹- 눌러담았다. 늘 그래왔던 것 처럼. 호원은 의외로 덤덤한 성열의 모습이 낯설었다. 난리칠 줄 알았더니, 예상외로 덤덤해 보여서 호원은 조금 어색했다. 마치 무거운 돌덩이를 내려놓은 듯, 조금은 홀가분해 보이는 성열의 표정에 호원은 살짝 웃어 보였다. "나한테 고백하냐 임마. 왜 그렇게 긴장해." "..긴장 안했어." "이 형님은 말이다. 이미 임자가 있-." "너 아니라고! 누가 너 좋대?" "...야. 장난이다. 까칠하기는." 성열은 입술을 감쳐물고 고개를 휙- 돌렸다. 쿵쾅쿵쾅. 성열은 끈적거리는 아이스크림 막대를 꾹- 쥐었다. 마음속 가열차게 불어대는 회오리 바람이 모래바람이라도 일으켰는지 따끔거린다. 호원 몰래 가슴을 꾹- 눌러내린 성열은 동우와 문자 보내기에 여념없는 호원을 내려다 보다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찬 바람에 결 좋은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그것을 신경질적으로 쓸어올린 성열은 저가 사라진 것도 모른체 히죽거리는 호원을 차마 돌아 볼 수가 없어 가만 고개를 숙였다. * * * 성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었다. 아으- 머리 아파.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내린 성규는 의자에 성의없이 걸어뒀던 가디건을 추슬러 입었다. 엊그제 새벽녘 쯔음에 편의점에 담배를 사러갔다 잠깐 소나기 처럼 내리고 간 비를 맞으며 들어왔더니, 감기가 걸린 것 같다. 시야가 핑글- 돈다. 김선생 어디 아파? 이명처럼 멍하니 귓가가 울린다. 소리가 조금 늦게 뇌로 전달되고 이해가 된다. 그리고 나름 재빠르게 부정을 하는데도, 정작 입에선, 느리고 조금 갈라진 부정의 답이 나온다.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김선생 가서 양호실에 좀 누워있지. 거기 이선생 계시던데." "괜찮은데-" "얼굴 하얗게 질려서는 뭐가 괜찮대." 성규는 등이 떠밀리는 대로 천천히 교실 문을 힘 없이 열었다. 무심코 마주친 시선. 아아- 그녀석이다. 성규는 순간 할말을 잊고 눈을 끔벅였다. 까만 눈동자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짙다. 이내, 크고 따듯한 손이 이마를 덮는다. "열 난다." 낮고 짙은 목소리에 괜히 온몸에 열꽃이 번지는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 성규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니가 무슨 참견이야, 저리 가." 그대로 제 앞에 선 명수를 밀쳐내고 가려다가 순간 발이 엉켜버렸다. 그대로 넘어질 뻔한 걸 명수가 잡아주었다. 젠장, 이런 식으로 녀석한테 신세지는 건 딱 질색인데… 하지만 왜 저를 잡고 있는 이 단단한 손을 뿌리칠 수가 없는지 성규는 알 수 없었다. 이내 명수가 말을 꺼냈다. "가요, 데려다 줄 테니까." 어쩌지, 두준이의 빈 자리가 이 녀석으로 채워지면 어쩌지? 성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명수의 부축을 받았다. * * * 저 깐깐한 녀석 화를 대체 어떻게 풀어준담? 우현은 아까 저를 걷어찬 이후로 단 한번도 제게 시선을 주지 않는 성종을 바라만 보면서 계속 생각했다. 괜히 또 장난스레 말을 걸었다간 매만 더 벌어먹을 것 같고… 지금은 야자 시작하기 바로 전 쉬는 시간이었다. 진짜, 단 한번도 쳐다봐 주지를 않네. 우현은 괜히 발만 동동 구르면서 성종을 원망스레 쳐다봤다. 이내 성종이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밖으로 나가자 우현은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성종을 따라 나섰다. 성종은 조금 걷다가 바로 계단으로 올라갔다. 어라? 왜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거지? 우현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주저없이 성종을 따라갔다. 그렇게 성종을 따라걷다가 멈춘 곳은 다름아닌 2학년 교실이었다. 성종은 창가 너머로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성열이었다. 그리고 성열은 제 자리에 앉아서 폰으로 동우와 카톡을 주고받는 호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열의 시선이 누구에게 가 있는지 빤히 보였기에, 또 호원을 보는 성열의 눈빛이 성열을 바라보는 저와 닮았기에 성종은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성종은 구슬프게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뭐야, 호원이 형이었어? 좋아한다는 사람이……."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때,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성열이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그걸 눈치챈 우현이 바로 성종의 손목을 덥석 잡아 끌고 갔다. 텅 빈 창가 너머를 바라보던 성열은 제가 잘못 느낀건가 하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시선을 다시 호원에게로 돌렸다. "놔!!" 성종은 제 손목을 세게 잡고 막 걸어가는 우현에게 소리쳤고, 우현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잡고 있던 손목을 놔주었다. 어찌나 세게 잡았던지 손목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성종은 씩씩거리면서 우현을 노려봤고, 우현 역시 그에 지지 않겠다는 듯 매서운 눈빛으로 성종을 노려봤다. "신파찍고 싶어서 환장했냐?" "…니가 신경쓸 바가 아니잖아." 차갑게 쏘아붙인 뒤 그대로 화장실을 나가려던 성종은 우현에 의해 벽에 밀어붙여졌다. 밀어내야 하는데 어쩐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이내 우현이 으르렁거리면서 말을 꺼냈다. "너 혼자 아픈 척 하지마." "……." "나도, 존나 아프거든?" 너 때문에. 그 말을 끝으로 우현의 입술이 성종의 입술을 덮쳤다. * * * "넌 수업,안 들어가?" "네" 왜? 라고 물을려고 하던 입술이 이내 굳어버렸다. 아마도 왜라고 물으면 들려올 명수의 대답이 두려웠기때문이었으리라. 지금으로써는 자신과 명수와의 대화는 곧 온몸의 퍼질 지독한 독과 같았다. 너를 마음속에 담지 않을거야, 그러기위해선 더이상 이 아이와의 관계를 좁히지 않는것. 그게 자신이 할수있는 최선의 방법이자 마지막 발버둥 이었다. "요즘 안 보이네요.그 사람" 성규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누군지 정확히 말하진 않았지만 그게 누구인지 알것도 같아 쉽사리 대답을 할수없었던 이유도 있었다. 이불을 덮어쓴 체 굳어버린 성규에게 명수가 손을 뻗었다. 성규는 자기도 모르게 흠칫하며 눈을 감았다. "……?"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상한 기분에 살짝 눈을 떠보니 자신의 이마를 짚으려는 동작 그대로 멈춘 명수의 모습이 들어왔다. 명수는 당황한 얼굴을 한 성규때문인지 손을 도로 거둔체 뒤로 조금 물러서며 그럴줄 알았다는듯 쓰게 웃었다. "…그냥 열이 어느정도 있는지만 볼려고" 명수의 흔들리는 눈엔 실망과 배신이 섞여있었다. 넌 지금 왜 그런 눈을 하는걸까. 성규는 어쩐지 모르게 아릿해져 오는 가슴에 미간을 찌푸렸다. 갈게요. 수업 들어야 되서요. 곧 명수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성규에게 등을 돌려 보건실을 빠져나갔다. 거짓말. 적어도 자신이 아는 김명수는 이 보건실 문을 닫는 즉시 곧바로 주저 앉고 말것이다. 그래 자신이 아는 김명수는 미련하고 강한척해도 속으로는 죽도록 외로워하는 그런 아이니까. 성규는 몸을 웅크리고 무릎에 얼굴을 올렸다. 그런 아이가 왜 하필 나를. 다시금 명수의 흔들리는 눈이 떠올랐다. 또다시 심장이 세차게 뛰다못해 곧 멎어버릴 듯해 성규는 자신의 가슴을 툭툭 치며 무릎에 얼굴을 완전히 묻어버렸다. 그런게 아닌데. 그저 겁쟁이라서 더이상 명수를 담아두기엔 너무 용기가 없어서 그런건데. 이 대답이 명수에게 전해지길 바라며 성규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 * * "야, 선생님이 나 어디갔냐 물으면 배탈나서 보건실에 갔다 그래라." "어디가는데!" "장동우 보러." 성열은 전기가 오 듯 찌릿해진 가슴켠을 탕탕 두들기며 일어스는 호원을 흘겨봤다. 어디 아프냐. 호원의 걱정어린 물음에 성열은 아랫입술을 물곤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다행이라며 축 처진 성열의 머리를 헝클이곤 어꺠를 툭툭 쳤다. 선생님한테 잘 말해달라고, 친구. 친구.. 호원의 저에게 뱉은 마지막 한 마디. 친구. 족쇄마냥 제 목을 조여오는 저 '친구'란 타이틀이 거슬렸다. 호원아, 너와 내가 친구가 아니면 난 네게 다가갈 수 있었을까? 고백이라도 했으면 이런 가슴 앓이 하지 않아도 될 텐데, 내 마음을 밝히는 순간 너와 내가 끝이 날 것만 같아 두려워.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호원의 모습을 끝까지 쫓던 성열이 한 숨을 뱉었다. 애써 꾸역꾸역 참아온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겁쟁이 이성열. 가지마, 이 세 글자 한 번 말하지도 못하고 끙끙 고열을 앓는 아이마냥 앉아있는 저의 모습을 보니 그저 한심스럽고 화가 났다. 지금 널 잡으면 넌 웃으며 다시 교실로 들어올까. "호원아, 가지마.." 주인이 없는 호원의 자리를 보며 용기가 없는 성열은 그제서야 호원을 낮게 불러봤다. 네가 들어서도, 알아서도 안 되는 마음을 꼭꼭 숨기며. * * * "하아, 하아, 하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간신히 우현을 뿌리치고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제 자리에서 가방을 들고 부리나케 다시 빠져나갔다. 정문을 지난 지 한참이나 되었음에도 성종은 계속해서 달렸고, 원래 서야 하는 버스정류장까지 지나치고 나서야 간신히 뛰는 걸 멈출 수 있었다. 멈추고 나니 숨이 미친 듯이 가파올라왔다. 숨을 좀 고른 뒤 손등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아직도 감촉이 생생했다. 제 입술 위를 덮어오던 우현의 입술, 그리고 안으로 들어오던 뜨거운 혀…… 성종은 입술을 막 비비면서 우는 소리를 냈다. 나쁜 자식, 천하의 못돼 처먹은 자식…!! "흐으, 개자식아…." 겨우 우현을 뿌리친 뒤 마지막으로 봤던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 떨어질 것 같은 눈을 하면서 저를 바라보던 그 눈빛이 너무나도 애절해서, 하마터면 그 눈빛에 말려들 뻔했다. 또 다시 우현을 받아줄 뻔했다. 그대로 뿌리치고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남우현, 니가 뭔데 이렇게 내 마음을 뒤숭숭하게 흔들어 놓는 건데? 숨이 가쁜 것 때문인지, 아니면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모를 심장박동이 좀처럼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 * * 성종이 저를 뿌리치고 나간 이후에도 한참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하던 우현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교실로 돌아갔다. 그러나 성종은 이미 가고 난 뒤였다. 다른 아이들에게 성종의 행방을 물으니 가방만 들고 미친 듯이 뛰쳐나갔다고 했다. 나 때문인가, 하는 생각에 우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자기가 무슨 정신으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마음 한 구석의 무언가가 확 끓어오르는 것을 주체하지 못한 것 뿐이었다. 참고, 억누르고, 애써 진정시켜왔던 그 마음이 활화산처럼 폭발해버린 것이다. "이성종…." 닿았던 그 감촉이 여전히 생생하게 느껴졌다. 따뜻하고, 부드러웠고, 달콤했다. 하, 진짜 간땡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구나. 피식, 하고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대체 어떻게 해야 그 녀석이 이성열이 아닌 나를 봐줄까? 몸으로 한번 부딪치고 나니 왠지 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어두운 터널을 걷는 것처럼 그저 암울하기만 했던 제 인생에 유일한 빛이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빛을, 잡고 싶다. 이내 결심이 선 우현은 바로 가방을 메고서 교실 밖을 나갔다. 그리고 무작정 성종을 찾아 달렸다. 그 정신으로는 아마 집에 가는 버스를 바로 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학교 주위를 무작정 뱅뱅 돌았을까… 우현은 마침내 놀이터에 있는 그네 위에 앉아있는 성종을 발견했다. 우현은 망설임 없이 바로 성종에게 다가가 그 앞에 섰다. 그러자 성종이 고개를 들었고, 허공에서 두 소년의 시선이 마주쳤다. "……." "찾았다, 이성종." 맞닿은 시선은 쉬이 끊어질 줄을 몰랐다. * * * "응, 두준아" -밥은 먹고 있지? "응. 너 이렇게 전화 해도 되는 거야? 국제 전화잖아." -너한테 하는 거니까 괜찮아. 성규는 귀와 어깨 사이에 핸드폰을 끼운 채 통화를 이어나갔다. 저는 고작 음악 선생일 뿐인데, 한 반의 담임이라는 이유로 야근이 잦았다. 이리저리 서류들과 학생들의 정보지를 뒤적이며 아까부터 계속해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인상을 찌푸린 채 종이 뭉치를 뒤적이던 성규는 이내 무언가를 찾고는 밝은 표정을 지었다. 남우현. 세글자가 적힌 학생 정보지였다. -아마 내일이나 모레 쯤 한국 돌아갈거야. "그래. 우리 집으로 바로 올거지?" -응. 그때 동안 내 생각만 하고 있어. "알았어. 어린애 같이 왜 그래." -그냥… 불안해서 그렇지. "어디 안가. 네 옆에 찰싹 붙어 있을거니까 빨리 돌아오기나 해. 보고 싶어." -알았어. 사랑해. "응. 나도. 빨리 끊어." 자꾸만 불안해 하는 두준 때문에 성규의 마음도 편하지 만은 않았다. 그를 자꾸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생각에, 또 자신은 두준을 불안하게 만들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입술을 깨물었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손에 들린 정보지를 내려다 보았다. 아무래도 우현이의 가정이 걱정이 되서였다. 어떤 방법으로든 우현이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의자에 가만히 걸터 앉았다. 아버지 혼자 덩그러니 쓰여있는 가족사항. 성규는 가슴이 저릿해서 콩콩 주먹을 쥐고 가슴께를 두드렸다. 어떤 방법으로 자신이 우현을 도와 줄 수 있는 건지 고민을 하느라 누군가가 저를 부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제 어깨를 잡고 흔드는 누군가에 의해 깜짝 놀라 고개를 급히 쳐들었다. "어? 어, 왜." "선생님, 지금 명수가 좀 이상한데." "어?" "야자 일교시부터 지금까지 책상에 내리 엎드려 있기만 해요." 단 한 번도 제가 피곤하다고 해서 책상에 엎드려 있거나 그러는 아이가 아니었다. 말도 안돼는 정신력으로 어떻게든 버티고 보는 아이였는데. 성규는 학생의 말에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교실로 달려가 보니 학생의 말대로 책상에 엎드린 채 미동도 없는 명수를 볼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 명수를 불렀다. "명수야?" "……." "명수야, 어디 아프니?" 대답이 없는 명수에 가만히 그의 등으로 손을 올린 성규는 소스라치듯 놀라며 명수를 잡아 일으켰다. 명수야! 교복 위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열과 뜨거운 숨. 파르르 떨리는 눈이 명수가 아프다는 것을 말 해주고 있었다. 성규는 명수를 급히 업고 학교를 벗어났다. 명수가 제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병원까지 달리면서 드는 생각 하나. …명수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 * * 어거지로 손을 잡고 그때 그 분식집으로 끌고 들어갔다. 예상 외로 성종은 별다른 반항 없이 우현에게 순순히 끌려갔고, 우현은 그런 성종의 모습에 조금 놀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떡볶이를 주문하고 먹는 내내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저 어색한 침묵 뿐이었다. 그 침묵을 먼저 깬 이는 바로 우현이었다. "미안하다고 안 할거야." "……." "그럼 내 행동이 별 거 아닌 걸로 치부되어버릴 게 뻔하니까… 절대 미안하다고 말 안할 거야." 그 말의 숨겨진 의미는 조금이라도 내 마음을 헤아려 달라는 우현의 애원이었다. 그 뜻을 알아차린 성종은 고개를 푹 숙이면서 별 말 않다가 간신히 입을 떼어 말을 꺼냈다 "…넌 정말 이기적이야." 이기적? 그게 지금 나한테 할 소리냐? 우현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성종에게 반박의 말을 내뱉었다. "이기적인 건 오히려 너 아니냐? 네 마음이 절대 안된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그런데도 왜 자꾸 포기 안할려고 발악하는 건데?" "……." "물론 아프겠지, 절대 그런 마음을 품어선 안될 상대를 사랑하는 네 맘이 아픈 건 오죽하겠어? 그런데, 그 옆에서 그런 널 바라보는 내 마음은 어떠겠어? 내 마음은 뭐 멀쩡할 것 같냐?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아." 너무 답답하고 미칠 듯이 아파와서 돌아버릴 지경이다. 이런 내 마음, 조금이라도 봐준다면 여한이 없을 텐데…. "이성종." "……." "성종아." 나한테도 기회를 좀 주면 안되냐? 우현의 눈물섞인 애원을 듣고만 있던 성종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섰다. "…떡볶이 잘 먹었어." "……." "…생각 좀, 하자.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몰아붙이지 마. 성종은 그대로 분식집 밖으로 나갔다. * * *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응급실로 달려간 성규는 침대에 명수를 눕힌 뒤 명수의 폰으로 부모님께 전화를 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일 때문에 바쁘다는 이유로 급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뭐야?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어?! 화가 나려고 했지만 애써 참은 성규는 이내 명수의 옆에 앉아 손을 꼭 잡았다. 손마저도 뜨겁다. 대체 이렇게 아플 때까지 왜 참은 거야?! 멍청한 녀석, 전교 1등에 학생회장인 녀석답지 않게 왜 이렇게 미련한 거냐고…… 가슴 한 구석이 시큰거려왔다. 그때, 명수가 눈을 감은채로 작게 무어라 중얼거렸다. 잘 안 들려서 귀를 기울이니 그 소리는 점점 메아리처럼 커져왔다. "하아, 하… 김성규, 김성규……." 무의식 중에서도 저를 찾고 있었다. 부모님이 아닌, 김성규를 찾는다. 이걸 대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그리고 왜 이런 모습에 제 마음은 이렇게까지 아파오는 걸까? 가슴이 와르르, 하고 무너져 내린다. 두준아, 미안하다. 나 정말 어쩌지. 이 어린 녀석이, 자꾸 내 마음을 잡아먹고 있어. * * * 끝없는 어둠 속에서 쏟아지는 빛줄기 하나. 손을 뻗어 잡으려 애를 써봐도 닿지 않는 그것에 명수는 울부짖었다. 네 곁엔 아무도 없어. 너 혼자야. 알잖아. 새삼스럽게 왜 이래. 너 혼자 모든 걸 해결해. 그 누구에게도 기대하려 하지도 말고 의지하려 하지도 마. 모든걸 네 스스로 하란 말이야. 끊임없이 명수에게 쏟아져 내리는 무거운 질책과 요구에 그는 한없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아무도 달래주지 않는데 울고 부르짖으며 슬픔을 토해내고 있었다. 소리를 내질러도 시원해지지 않는 가슴과 달래지지 않는 외로움은 늘 명수를 아프게 만들었다. 단단해 보이는 겉모습도 올곧아 보이는 성격도 모두 끊임없는 핍박과 압박 속에서 만들어 낸 일종의 가면 같은 것들이었다. 숨을 내쉬기가 힘든 공기 속에서 알 수 없는 것을 위해 끊임없이 울며 내달리고 있는데 등뒤를 따스히 감싸안는 온기 하나. 머리위로 떨어지는 환한 눈부신 햇살 하나. 손을 붙잡아주는 편안한 느낌하나.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너의 곁에 내가 있어 줄게. "...김..성규?"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 편안했는지도 모른다. 왜 그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내가 그를 사랑하기에 그럴거라 생각하며 감기는 눈꺼풀에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나를 가득 끌어안아 주는 따스한 온기에 걱정할 것도 없이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현실의 명수가 서서히 눈을 떴다. "정신이 들어?" 눈을 뜨자마자 시야 가득 들어차는 걱정 가득한 얼굴 하나. 내가 너무 사랑하는... 김성규. * * * "요즘 성열이가 기운이 없어 보여." 야자까지 마치고 나란히 집에 돌아가는 길, 동우가 호원의 팔이 걸쳐져 있는 제 어깨를 축 늘어뜨리면서 성열의 걱정을 하자 호원은 괜히 질투가 났다. 어째 애인인 나보다 이성열을 더 걱정하는 것 같단 말이지. "형은 나보다 걔가 더 걱정되는 거에요?" "아니, 성열이가 요즘 들어서 너무 기운이 없어 보이니까 그렇지. 너는 친구면서 성열이 걱정도 안해?" 동우가 핀잔을 주자 호원은 입을 삐죽 내밀면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동우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제가 보기에도 최근 들어서 성열이 부쩍 기운이 없어 보이긴 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건지… 아, 좋아하는 사람 있다더니 혹시 그것 때문인가? 대충 성열의 기분이 저기압 상태인 이유를 어림짐작한 호원이 동우에게 말을 건넸다. "걔 좋아하는 사람 있대요." "진짜? 누구?!" "몰라요, 그것까진 말 안하더라고요." "그럼 성열이가 짝사랑 때문에 그렇게 기운이 없었던 거구나!" 근데 그 상대를 모르니 우리가 어떻게 해줄 수도 없잖아, 하면서 동우의 표정이 다시금 시무룩해진다. 호원은 그 모습이 귀여워서 동우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으이이익!!" "진짜 형은 대천사에요. 날개 잃은 대천사." "그거 칭찬이야?" "칭찬이죠." 그래서 내가 형을 좋아하는 거 아니겠어요. 호원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 * * 명수가 천천히 눈을 뜨자 성규는 잡고 있던 명수의 손을 더 꽉 잡아왔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젖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성규의 모습에 명수는 뜨거운 숨을 내뱉으면서 몸을 일으키려 했고, 성규가 바로 엄한 표정을 하면서 제지했다. "안돼, 너 아직 더 누워 있어야 돼." "으윽, 나 괜찮……." "내 몸 걱정해줄 시간은 있고 니 몸 챙길 시간은 없어? 너 왜 이렇게 미련해!! 니가 정말 학생회장 김명수가 맞긴 해?!" 울먹이면서 저에게 화를 내는 성규의 모습에 명수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지금 저에게 화내는 이유가 진심으로 저를 걱정해서라는 게 느껴졌기 때문에… 명수가 옅게 웃어보이자 성규는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명수를 노려봤다. "뭐가 좋아서 웃어?!" "…나 많이 걱정했어요?" "그래! 아까 너 의식 없었을 때 니 폰으로 부모님께 연락 드렸는데 두분 다 바쁘다는 말만 하시고 바로 끊더라." "……." "아무리 그래도 아들이 아프다는데 어떻게 아들보다 일이 더 중요할 수가 있어? 너네 부모님 친부모님 맞아?" "아뇨." 그냥 홧김에 내뱉은 소리였는데 예상치 못한 명수의 대답에 성규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명수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친부모님 아니에요." "…뭐?" "나 낳아준 친부모님은 고아원에다가 날 버렸어요. 지금의 집에 입양된 게 아마 여섯 살?" 그럼 그때 버려지는 게 익숙하다는 말이…… 이 녀석, 대체 얼마나 큰 상처를 품고 살아왔던 거지? * * * 교실문이 드르륵 열리며 성열이 들어섰다. 호원의 시선이 자연스레 성열에게로 한 번, 그리고 제 손목시계로 향했다. 이성열 저거 조금만 늦었으면 지각 할 뻔 했네. 또 토기뜀 뛰면서 개고생 했겠군. " 왔냐? " 호원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제 옆자리에 앉은 성열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호원의 행동에 성열의 몸이 흠칫 떨렸다. 멍한 표정으로 눈만 껌뻑 껌뻑 거리던 성열은 이내 표정을 굳히곤 제 어깨에 걸쳐진 호원의 팔을 떼내었다. " 오늘은 아침부터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좋아 한다는 얘하고 잘 안 되냐? " " 그런거 아니야, 더워서 그래. " 호원의 물음에 성열이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건성으로 답했다. "오늘 별로 안 더운데? " 호원의 말에 성열은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 눈을 감고 책상에 얼굴을 파 묻었다. 성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 호원은 씩, 웃으며 성열의 몸을 살살 흔들기 시작했다. 야, 너랑 나 이래뵈도 불알친구 아니냐? 니 표정만 봐도 다 알아. 좋아 한다는 얘 때문에 그러는거 맞잖아. 호원이 팔짱을 낀 채 조잘 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는 성열을 보며 호원은 어쩔수 없다는 듯 성열의 옆구리를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기습적인 공격에 성열이 몸을 베베꼬며 책상에 파 묻었던 얼굴을 치켜 들었다. 성열은 웃음을 참으며 호원의 팔을 떼어내려 했고 호원은 더욱더 끈덕지게 달라 붙었다. " 그,,그래! 맞다고. 맞아. 니 말대로 잘 안되서 그래! 그러니까 그만해! " 성열이 두 손을 들어 올리며 항복의 표시를 내비치자 호원은 그제서야 행동을 멈추었다. 너무 웃어 눈가에 눈물까지 맺힌 성열이 호흡을 가다 듬기 시작했고. 호원은 성열이 숨이 고르기도전에 쏘아 붙이기 시작했다. " 그럼 그렇지. 대체 얼마나 잘난 얘길래 그 난리냐? " " 몰라도 돼. " " 답답해서 그런다 병신아. 고백을 해보던가. 그렇게 혼자 속앓이 한다고 걔가 알아 주겠냐? " " …. " 정곡을 찌르는 호원의 말이 성열의 가슴팍을 뚫고 심장에까지 파고 들었다. 호원의 말이 맞다. 저 혼자 이렇게 속앓이를 해봤자 달라지는건 없다는것을 안다. 그런데 그게 너니까,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향해 있는 너라서, 그래서 이렇게 가슴이 미어 문드러지면서도 속앓이를 할 수 밖에 없는 나를. 너는 모르겠지. 너에게 나는 그저 아주 오래된 친구일 뿐이니까. 친구 그 이상, 이하도 아닐 뿐이니까. 그러기에 가슴이 하루에도 수십번 무너저 내리는걸 느끼면서도 나는 너에게 고백을 할 수가 없다. 네가 알아서는 안되는 나만의 비밀…. 성열은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가슴으로 곱씹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야, 이성열! 곧 아침 조회 시작하는데 어디가! 너 설마 삐졌냐? " 저를 부르는 호원의 외침을 무시하며, 성열은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붙들고 교실을 유유히 빠져 나갔다. 나쁜 놈, 진짜 나쁜 놈…… 교실을 나서자마자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누가 보건 말건 상관없었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면서 소리를 내어 울던 성열은 이내 계단에서 내려오는 동우와 마주쳤다. 눈물로 잔뜩 얼룩진 성열의 얼굴을 본 동우의 얼굴이 놀란 기색으로 바뀐다. 이내 계단에서 바로 내려온 동우가 성열의 팔을 잡고 걱정스런 얼굴로 성열에게 물었다. "서, 성열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싫다. 호원의 연인이라는 게 싫고 저를 이렇게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것조차도 싫다. 다 싫다. 장동우의 모든 것이 싫다. 성열은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제 팔을 잡고 있는 동우의 손을 거칠게 떨어뜨렸다. 그에 동우가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몸을 움츠렸고, 성열은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아낸 후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요?" "…응?" "나 있죠, 형이 되게 싫어요." "……." "형이 이호원이랑 사귀는 게 싫고, 착해서 싫고, 나를 이렇게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게 싫어요." "서, 성열아…." "짜증나니까 좀 꺼져줄래요? 지금은 형 얼굴 볼 기분 아니니까…." 크게 뜨여진 동우의 눈이 금세 눈물로 차올랐고, 성열은 이를 악물면서 그대로 동우를 지나치려 했다. 그때, 성열을 쫓아 달려왔던 호원이 성열의 어깨를 잡고 거칠게 돌려세웠고, 이내 성열의 뺨을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다. 성열이 크게 휘청거리면서 호원에게 맞은 부위를 손바닥으로 감쌌고, 호원은 그런 성열을 매섭게 노려보면서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너 돌았냐? 왜 니 화풀이를 애꿎은 동우 형한테 하는데?" "……." "그게 싫으면 애초에 사람 걱정시킬 일을 만들지 말든가!! 원인제공은 니가 해놓고 왜 동우 형한테 지랄이냐고!!" "호원아, 그러지마. 성열이한테 화내지마… 응?" "형은 바보에요? 왜 그런 소릴 듣고도 가만히 있어요?! 한대 쥐어박았어야죠!!" 너는 끝까지 동우 형밖에 모르는구나. 성열은 씁쓸한 듯이 웃으면서 호원을 바라봤다. 목이 아프다. 금방이라도 네가 좋다는 말이 목구멍을 넘어갈 것처럼 위태롭다. 하지만 이놈의 쓸데없는 이성이 그것을 필사적으로 막아낸다. 하지 말라고, 죽어도 그것만은 안된다. "…니가 제일 나빠." "뭐?" "형도 나쁘지만 니가 제일 나쁘다고 이 개자식아!!!" 그 말을 끝으로 성열은 두 사람을 지나쳐 갔다. 뒤틀렸다. 완전히 뒤틀려 버리고 말았다. 고백만 안 했다 뿐이지 이젠 정말로 돌이킬 수가 없다. 더 이상은 태연자약하게 호원을 볼 자격이 없었다. 호원과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볼 자신이 없다. 아까 전보다 더 크게 소리를 내면서 울었다. 그러다가 앞에 걸어가던 누군가와 부딪쳤다. 성종이었다. "형, 울어?" 성종이 놀란 눈을 하면서 묻자 성열은 다시 울음을 참으려다가 결국엔 참지 못하고 크게 터트려 버렸다. 그에 성종은 놀란 얼굴을 하다가 이내 말없이 성열을 꼭 끌어안았다. * * * 곧 있을 중간고사 문제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다. 성규는 동료 교사와 점심을 간단히 먹고 교무실로 돌아와 중간고사에 출제할 문제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의자에 앉아 열심히 타자만 두드리고 있으려니 목이 칼칼하던 찰나에 제 앞으로 드리워지는 그림자. 그리고 제 앞에 놓여지는 캔커피. 자연스레 성규의 고개가 위로 향했다. " 김명수? " 명수가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살짝 숙여 성규에게 인사했다. 선생님이 좋아하는 캔커피예요. 명수가 나긋한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이 녀석 내가 이 브랜드의 캔커피를 좋아하는지 어찌 알았지? 하긴, 날 좋다고 따라 다니는 녀석인데 아는게 이상할것도 없지. 성규가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어제의 일로 인해 사이가 조금은 친밀해진게 아닐까 하는, 적어도 성규는 그렇게 느꼈다. 감당하기 힘들었던 상처를 잊기 위해 가면을 쓰고 또 그 위에 가면을 써왔던 김명수. 그렇게 본인 스스로를 철처히 고립 시켜 나가던 아이가 제 민감한 속사정을 털어놨다. 어떻게 보면 우현이와도 비슷하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거, 그리고 보기보다 좋은 녀석들이라는것 말이다. " 너 이제 몸은 괜찮은거지? " " 예. " 성규가 캔커피를 크게 한모금 들이키고는 명수에게 물었고, 명수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거려 보였다. 그리고 또 다시 흐르는 정적. 이 어색함은 뭐지? 성규는 괜시리 헛기침을 하며 이 어색함을 달래려 했다. 이건 뭐 친밀해진게 아니고 더 어색해진거 같잖아. 뭐, 그건 녀석도 마찬가지인거 같긴 하다만. 나한테 본인 가정사를 얘기해버렸으니, 성규가 속으로 꿍시렁대며 명수의 눈치를 살폈다.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눈동자에 괜시리 긴장이 되기 시작한다. 저렇게 사람 빤히 쳐다보는것좀 고치면 좋으련만. " 그런데 너 언제까지 거기에 그렇게 서 있을거야? 시험 문제 출체 기간에 교무실에 이렇게 막 들어와도 되는거야? 이러다가 괜히 의심 받는다? " "선생님만 계시잖아요," 음, 하긴, 맞는 말이네. 나만 있으니까 들어와도 되겠네, 아니, 아니지. 이게 아니잖아! 난 뭐 선생으로 안 보인다는 얘기 아니야? 은근히 기분 나쁘네. 아, 나도 모르게 녀석에게 말려 들어버렸다. 이 녀석의 말싸움은 도저히 이길수가 없다. 그렇게 녀석을 내보내는건 물거품이 되었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명수를 애써 무시한채 타이핑을 해나가던 찰나, 핸드폰 진동이 울려왔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무심코 전화를 받았다. 정신이 없으려니 발신인을 확인하는것도 깜빡한채 말이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성규야, 나 일본 출장 끝나고 지금 막 서울 도착했어.] 두준의 목소리.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명수에게로 향한 내 시선. 교차하는 눈빛. 흔들리는 명수의 눈동자를 보며 심장이 덜컹 가라앉는것을 느껴야만 했다. * * * 왜 우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를 못했다. 그러기에는 성열이 너무 서럽게 울어서, 그저 등을 두들겨주며 달래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왠지 우는 이유를 짐작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성열을 겨우 달래 복도에서 헤어진 뒤 성종은 뒤숭숭한 마음으로 교실에 돌아왔다. 형도 나만큼 아프구나, 내 마음만 아픈 줄 알았는데 형도 그 못지 않게 무지 아팠구나. 그렇게 서러운 모습으로 아이같이 우는 건 태어나서 처음 봤다. 성종에게 성열은 언제나 큰 아름드리 나무 같았다. 든든했고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존재였는데, 그런 성열이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제 앞에서 우는 기색조차 보인 적이 없었던 성열이 엉엉 우는 모습을 보였다. 그제서야 성열이 지고 있는 마음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그 때문인지 수업내용이 좀처럼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점심도 대충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렇게 힘없이 교실로 돌아가려는데 뒤에서 누가 저를 붙잡아온다. 반강제로 뒤를 돌아보니 그 장본인은 다름아닌 우현이었다. 우현의 반대쪽 손에는 검은 봉지가 들려져 있었다. 그 안에는 삼각김밥과 이온음료가 들어있었다. "…뭐야?" "너 아까 보니까 점심도 깨작깨작 먹던데, 이거라도 먹어. 삼각김밥이랑 음료수야." "됐어, 생각 없어." "먹으라면 먹어, 너 그러다가 쓰러질 것 같아서 그래." 그렇게 말하고는 손목을 더 꽉 잡은 채 벤치 쪽으로 끌고 가 억지로 앉혔다. 진짜 생각 없는데, 하고 중얼거리는데도 우현은 못 들은 체 삼각김밥을 까서 성종의 손에 쥐어준다. 그리고 캔을 따서 성종의 옆에 놓아주었다. "다 먹을 때까지 감시할 거야." "……." "안 먹어? 먹는다, 실시." 진짜 안 먹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기세에 성종은 어쩔 수 없이 삼각김밥을 한 입정도 베어 물었다. 천천히 마시면서 먹으라는 말에 이온음료도 조금씩 마셨다. "잘만 먹네." 씨익 웃으면서 제 머리를 쓰다듬자 성종이 고개를 푹 숙였다. 간지러운 곳은 머리인데 이상하게 엉뚱한 곳이 간지럽단 느낌이 든다. 대강 소화가 되었단 느낌에 성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이 울었어." "……." "내 앞에서 그런 식으로 울어본 적이 없었는데, 막 엉엉 울더라. 마음이… 너무 아팠어." 쳇, 곧 죽어도 이성열 걱정만 하는구만. 우현이 궁시렁거리면서 인상을 쓰자 성종이 우현의 머리에 살짝 꿀밤을 먹였다. "악! 왜 때려?!" "그런 식으로 삐딱하게 나오지, 자꾸." "니가 날 이렇게 만들고 있거든?" 우현의 말에 성종은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우현을 노려봤다. 내가 뭘 어쨌다고…!! "너 짜증나." "내가 뭐?" "다, 다 짜증나!" 그렇게 말해버린 뒤 성종은 자리에서 일어나 터벅터벅 걸어갔다. 우현은 머리를 마구 헝클면서 성종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아이 씨, 저 년은 또 왜 저 지랄이야?! 내가 뭘 어쨌다고!! 하 진짜…. 우현은 표정을 잔뜩 구긴채, 슬리퍼를 질질 끌며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무심코 고개를 돌린 성종은 제 뒤를 졸졸 따르고 있는 우현을 보고 흥, 하고 콧방귀를 끼며 걸음을 멈춰섰다. " 왜 따라와? 너는 배알도 없…. " " 교실 가는거거든? " 까탈스레 소리치는 성종의 말을 뚝 끊어 먹은 우현이 그대로 성종의 옆을 지나쳐 앞서 나갔다. 성종은 급 밀려오는 무안함에 화끈 거리는 얼굴을 하고는 우현의 뒷모습만을 멍하니 바라 보았다. 음, 좀전에 내가 너무 심했나? 그래서 저러는건가?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점심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에 화들짝 놀란 성종이 재빨리 우현의 뒤를 따랐다. 성종은 우현의 옆에 멈춰 나란히 걸음을 맞췄다. 그런 성종을 보며 우현이 참다 못한 웃음을 터뜨렸다. " 뭐야? 너야말로 나 왜 따라오냐? " 좀 전에 제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갚아 오는 우현의 모습이 성종에게는 그렇게 얄미워 보일수가 없었다. 성종은 팔짱을 끼고는 잔뜩 새침한 표정을 한 채 답했다. 나도 교실 가는거거든, 이라고. 그런 성종의 반응에 우현이 배를 부여 잡으며 크게 웃어 재끼기 시작했다. " 뭐야, 남우현. 너 갑자기 왜 웃어? " " 너 진짜 왜 이리 귀엽냐? " 누가 귀엽다는거야, 내가? 하, 참나. 우현의 행동에 기가 찬 성종이 눈에 쌍심지를 켠채 우현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노려보면 누가 무서워 할 줄 아냐? 우현이 비아냥 거리기 시작하자 성종은 또 다시 화기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열에 받쳐 빨갛게 달아오른 성종의 얼굴을 보며 우현은 더욱더 큰 소리로 웃어 재끼기 시작했다. 아, 진짜 웃지 말라고! 참다 못한 성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 그렇게 소리 지르는것도 하나도 안 무서워. " 능구렁이처럼 깐죽대며 그 말을 내뱉은 우현이 이번에는 성종의 얼굴로 두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성종의 볼살을 살짝 꼬집어 당겼다가 떼었다. 그런 모습도 귀여워보여. 눈웃음과 함께 귓가로 흘러 들어오는 우현의 다정한 음성에 성종은 좀 전에 느꼈던 그것을 또 한번 느꼈다. 심장이 간질간질 꼬르냥냥 하던 그 느낌을. * * * 「 형도 나쁘지만 니가 제일 나쁘다고 이 개자식아!!! 」 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형보다 내가 제일 나쁘다니, 왜? 호원은 머리를 막 헝클어뜨리면서 성열이 앉은 자리를 쳐다봤다. 성열은 잔뜩 벌개진 눈을 하면서 가만히 앉아 수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호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성열에게 다가갔다. "야, 이서……." 그러나 호원이 성열의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성열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가버렸고 호원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아, 이젠 말도 섞기 싫다는 건가? 대체 저 녀석을 애태우는 그 개자식이 누구길래 쟤 기분이 저렇게까지 저기압이 되어버린 거야? 그 자식, 잡히기만 해봐. "후우…." 그러나 호원은 몰랐다. 그 개자식이 바로 자기라는 사실을. * * * 오늘은 야자 담당이 아니어서 성규는 다른 선생들보다 조금 더 일찍 퇴근준비를 했다. 방금 전 두준에게서 연락이 왔다. 집 근처에서 기다리겠다고. 그에 성규는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 웃음기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웃음기가 아니었다. 이래저래 복잡한 마음을 안고 교무실을 나서는데 하필 그 앞을 지나가던 명수와 딱 마주쳐 버리고 말았다. 잠깐동안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고, 이내 성규가 먼저 헛기침을 하면서 말을 꺼냈다. "어, 어디 가?" "화장실 갔다와서 교실 들어가는데요. 그럼 선생님은… 퇴근하세요?" "으응." "그럼 그 사람 보겠네요. 아까 연락왔었잖아요." "…그래."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무덤덤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명수의 모습에 성규는 왠지 모르게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건지, 전혀 질투같은 게 나지 않는 건지…… 혼란스럽다. 성규는 지금 이 순간 명수가 두준에게 가지 말라고 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지금의 미적지근한 반응을 봐선 명수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올 것 같진 않았다. 결국 성규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명수에게 그만 가보란 말과 함께 그대로 등을 돌려 가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걸음을 빨리 해 학교 건물 밖을 나가 주차장까지 갔다. 시동을 켜 핸들을 잡고 운전하는 내내 성규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이런저런 생각들이 엉켜 들어갔다. 흔들리지 않겠다고 해놓고, 두준이 외의 다른 남자는 쳐다보지도 않겠다고 다짐해 놓고선 왜…… 머지않아 집 근처에 도착해 차를 주차시킨 성규는 저를 기다리고 있던 두준과 마주했다. 두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성규도 그를 따라 간신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다녀왔어." 이내 두준이 두 팔을 벌리자 성규는 말없이 두준에게 안겼다. 그러나, 심장박동은 지극히 정상적이기만 했다. "…보고 싶었어." 그 말 또한, 무미건조했다. * * * "하...." 석양이 하늘을 붉은 빛으로 수 놓을 때 까지 성열은 저 홀로 집 근처 놀이터에 있었다. 낮에 학교에서 충동적으로 뱉은 한 마디.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된 그 한 마디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는게 싫었다. 마음같아선 목 놓아 울고 싶었지만 제 주위에서 꺄르르 웃고있는 어린 아이들을 볼 때면 그럴 수 없었다. "이호원.." 이렇게 울고싶은데도 미워하고 싶은데도 그 녀석을 그리워하는 저 자신이 답답했다. 처음엔 녀석을 바라볼 때마다 설레이던 그 느낌이 좋았다. 날 바라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누구보다 '친구' 란 이름으로 곁에 있던 것이 즐거웠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어느 날 부터 나 몰래 커져가 마음을 멈출 수 없었다. 옆에 있으면 손을 잡고 싶고, 장난삼아 서로에게 욕을 뱉을 때도 그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고. 꾹꾹 눌러담은 감정이였는데, 오늘 이렇게 허무하게 터져버렸다. 한심했다. "..성열아?" 아파오는 머리를 붙잡고 혼자 있는 놀이터 그네에 앉아있었는데 제 머리 위로 흩어지는 익숙한 음성에 고개를 올렸다. "왜 울어, 열아.." 저의 사랑앓이의 원인, 동우였다. 성열의 눈동자가 흔들였다. 외줄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저 자신을 밀어버릴 사람이였다. 저 한 사람 때문에 제가 죽어갈 수 있는 걸 알면서도 미워할 수 없었다. 왜 그런진 성열도 몰랐다.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동우 특유의 성격때문일까. 비어있는 옆 그네에 앉은 동우가 저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참아왔던 서러움이 울컥 눈물로 제 볼을 적셨다. "흡..허엉..!" 어미를 잃어버린 새끼마냥 목 놓아 울어버리는 성열의 모습에 동우는 당황스러웠다. 그저 낮에 호원이가 때린 곳이 아플까 싶어 부른 것 뿐인데. 많이 아팠나? 아직은 어린 동우의 마음이 걱정으로 가득찼다. 안아줘야하나. 달래주고 싶지만 어찌 할 줄몰라 바둥거리던 동우는 성열의 목소리에 멈췄다. "난요..흐윽, 형이 너무 싫어요.. 근데 미워 할 수 없어서 내가 더 싫어요.." "....." "내 자리를.. 뺏겼는데, 흐으.. 내가 그 아이 옆에 있..흐엉,어야 하는데.." "..." "형을 볼 때마다.. 웃음이 가득한, 흐으으.. 그 아이 얼굴을 볼 때면 난.. 난 모르겠어요..흡." 동우는 아무 말 하지 못 하고 그저 성열을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항상 저와 호원이 만날 때 마다 옆에서 인상을 쓰던 모습과, 저에게 독기어린 말을 뱉었던 행동 하나하나가 이제서야 이해가 갔다. 왜 진작에 알아채지 못 했을까. 미안한 마음은 동우의 입을 꾹 닫히게 하였다. "다 말해버렸어.. 꽁꽁 숨기고 있던..걸 흐으.. 날 피하겠..죠?" 도대체 어디서 부터 꼬였던거지. 서로를 보며 웃는 저와 호원이를 보며 이 아이는 얼마나 아파하고 상처 받았을까. 열아, 우리 셋은 언제 적으로 돌아가야 아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따라 붉은 하늘이 슬퍼보였다. * * *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두준은 침대에 엎드린 채로 제 옆에 누운 성규에게 그동안의 안부를 물었고, 그에 성규는 말없이 웃기만 하다가 대답했다. "그냥, 뭐… 그럭저럭."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 왠지 모르게 그늘이 드리워진 것 같은 성규의 얼굴이 신경쓰였던 두준이 성규의 뺨을 손등으로 쓸면서 물었고, 성규는 그런 두준의 손을 잡으면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허리와 골반 부근이 미칠 듯이 아파왔지만 애써 참았다. 두준이 왜 일어나냐며 성규를 말렸지만 성규는 기어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두준에게 말했다. "두준아." "어, 왜." "…우리 헤어지자."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헤어지자고 말하자 두준은 누군가가 뒤통수를 세게 후려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몇초동안은 그 말을 실감할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도 않았다. 제 환청이었음 싶었다. 헤어지자니, 어떻게 제 옆에 두었는데, 겨우 제 곁에 잡아둔 사람인데 이렇게 허무한 식으로 이별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두준은 이내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 거짓말이지? 내가 잠깐 출장 갔다올 동안 연락 안 했다고 지금 장난치는 거지?" "나 장난 싫어하는 거 알잖아." "…그 자식 때문이야?" 두준의 머릿속에는 바로 명수가 떠올랐다. 저를 조롱했던, 그리고 성규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는 새파란 좆고딩. 그러나 성규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부정했다. "명수 탓이 아냐." "니가 지금 나한테 헤어지자고 할 이유가 그 자식 때문이 아니면 대체 뭔데?!" "두준아." "너 그거 동정이야!! 명백한 동정이라고!! 너 그거 사랑이라고 착각하면 안된다? 성규야, 정신차려!" "동정 아니야!!!" 성규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내자 두준은 순간 멈칫했다. 이내 성규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대답했다. "나보다 더 외로워하는 그 녀석 옆에 있어주고 싶어." "……." "니가 나한테 사랑을 줘서 내 외로움을 달래주었듯이, 나도 그러고 싶어. 내 마음을 그 애에게 나눠주면서 그 애가 느끼는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어." 성규의 말에 두준은 비로소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김성규는 이제 더 이상 윤두준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 김성규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이는 바로 김명수다. 두준이 바람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면서 눈을 질끈 감았고, 성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이내 두준이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입은 뒤 맥없이 걸어갔다. 그러다가 우뚝 멈춰서고는 다시 뒤를 돌아보며 성규에게 말했다. "…내일, 내일 다시 얘기하면 안 되겠어?" "내일 다시 얘기한다 해도 내 대답은 똑같을 거야." "…참 잔인하네, 김성규." 이렇게 내 마음을 처참하게 짓밟아버리니 말이야… 그대로 나가버리는 두준의 뒷모습은 너무나도 쓸쓸해 보였다. * * * 요 며칠간 중간 고사 문제를 출제 하느라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해 눈꺼풀이 무거웠다.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며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학교에 도착한 성규는 하품을 하며 교무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교무실안에 있던 선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성규에게로 향했다. 평소와는 다른 묘한 분위기에 성규는 두 눈을 껌벅 거렸다. " 김선생! 이리 와봐요! " 순간, 교감 선생이 격양된 톤으로 성규의 이름을 외쳐왔다. 핏줄이 설 정도로 미간을 잔뜩 찌푸린 교감의 모습에 성규는 긴장을 한 채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제 앞에 멈춰선 성규를 보며 교감이 손을 뻗어 제 앞에 있는 노트북 화면을 가리켰다. 성규의 시선이 자연스레 노트북 화면으로 향했고, 화면을 바라보는 성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컴퓨터 화면에는 남자 둘이 전라 상태로 침대 위에 엉켜 낯뜨거운 행동들을 하는 사진이 담겨 있었다. 한 남자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고, 또 다른 남자의 얼굴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지 않은 남자의 얼굴. 그건 분명 성규였다. 그리고 저와 엉켜 있는 남자는 두준이 분명했다. 성규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수 있단 말인가. 설마 두준이 이런짓을. 성규의 주먹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 김선생! 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할거야?! 학교 홈페이지에 이런 사진이 올라왔다고! " 교감이 성규를 쏘아 붙이기 시작했고, 충격에 휩싸인 성규는 아무말 없이 고개를 푹 숙인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 여자도 아닌 남자하고 뒹구는 사진이라니. 자네 지금 이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당신 같은 더럽고 문란한 사람한테 자기 자식을 맡길 수 없다고 학부모들한테 항의 전화가 쏟아지듯 오고 있어!! 대체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거냔 말이야!! " " 죄송합니다. 교감 선생님. 제가 다 책임 지겠습니다…. " 성규의 목소리가 착 가라 앉았다. 슬핏, 젖어 있는것 같기도 했다. 성규는 아무말 없이 교무실을 나섰다. 때마침 교무실 근처를 지나던 학생들이 성규를 발견하곤 수근 거리기 시작했다. 씨발, 학교 홈페이지에 올라온 사진 봤어? 존나 순진한척 하더니, 할 건 다 하고 다녔네. 거기다가 상대가 남자였잖아. 씨발. 선생이 게이라니. 아, 멘붕이다 진짜. 학생들이 수근 거리는 소리에 성규는 귀를 틀어 막고 싶었다. 다 들으라는듯 큰 소리로 짓걸여 오는 말들은 비수가 되어 성규의 가슴 깊숙히 꽂혀 들어왔다. 그런 성규의 주변으로 학생들이 점점 더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미 학교 전체에 소문이 쫙 퍼진듯 했다. 어느새 성규를 둘러싼 학생들로 인해, 성규는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선생님, 남자랑 하면 어때요? 기분은 좋아요? 선생님이 깔리는쪽? 그렇게 성규에게로 음담 패설이 오가던 순간, 한 녀석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고 그 위로 명수가 올라탔다. "개새끼야, 한번만 더 지껄여봐. 어? 한번만 더 지껄여 보라고!!" 그리고 이어서 들려오는 소리. 퍽, 퍽, 퍽. 성규는 제 눈 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믿을 수가 없었다. 명수가, 전교 회장인데다 교내에서 행실이 바르기로 자자한 그 명수가 지금 사람을 패고 있었다. 두 눈에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격한 분노를 담은 채로…… 다른 이들의 시선도 전부 명수에게로 옮겨갔다. "그 더러운 주둥아리로 한번만 더 지껄여 보라고!!" 안된다. 더 이상은 안된다. 그 생각에 성규는 급히 명수를 붙잡고 그 학생에게서 떼어내려 했다. 그 학생은 얼굴이 만신창이가 되어 퉁퉁 부어올라있는 상태였다. 억지로 떨어뜨려 놓으니 그 학생의 몸이 바닥에 축 늘어진다. 명수가 격하게 몸부림을 치면서 성규를 떼어내며 성을 냈다. "씨발, 당신은 분하지도 않아?! 다른 새끼들이 당신에 대해 더러운 말들을 지껄여 대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거냐고!!" "명수야…." "너희들, 잘 들어. 한번만 더 김성규에 대해 허튼 말 지껄이면 그땐 내가 다 죽여버릴 줄 알아." "그만해, 제발 그만해!!!" 지금도 벅찬데 너까지 이러면 나는…… 뒤의 말을 잇지 못한 성규가 소리없이 흐느꼈고 그에 명수가 다른 학생들에게 으름장을 놓던 것을 뚝 그치고 성규를 바라봤다. 울고 싶지 않았는데, 이 녀석 앞에서 더는 약한 모습 따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명수의 손이 성규의 어깨에 올라가려 하자 성규가 그것을 조용히 제지하고선 말했다. "…나중에, 나중에 얘기하자." 그 말을 끝으로 성규는 도망치듯이 학교를 빠져나가버렸다. 명수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성규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켜주고 싶은데, 애석하게도 그럴만한 힘이 없다. 이럴 때는 제가 아직 어린 학생이라는 사실이 무척 싫었다. 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줄 수가 없는 걸까? 대체 왜……. * * * 교실 안이 소란스럽다. 대다수의 입에서 성규에 관한 얘기가 오가는 것을 들은 우현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자 허, 하고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누가 그런 사진을 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질 한번 참 나쁜 새끼네. 그럼 김성규는 어떻게 되는 거지? 짤리는 건가? 왠지 모르게 착잡해진 우현이 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내 제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번호를 보니 모르는 번호다. 뭐야? "여보세요." - 남세준 씨 아들 남우현 맞습니까? 낯선 남자의 이름에서 거론된 제 아비의 이름에 우현의 표정이 굳어진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심장이 덜컹, 하고 내려앉았다. 우현은 간신히 입을 뗐다. "…그 인간 아들은 맞아요." - 여기, ○○병원입니다. 아버님이…… 습니다. 그 말에 우현은 멍한 눈으로 폰을 툭, 하고 떨어뜨렸다. 몸이 절로 떨려왔다. 거짓말, 거짓말. 어떻게 그 인간이 그렇게 쉽게 죽어? 눈물이 저도 모르게 나왔다. 자리에서 저도 모르게 일어났다. 제 아버지라는 인간이 누워있을 병원으로 달음질 쳤다. 교실 창문에서 밖을 내다보던 성종은 의아한 얼굴로 달려가는 우현의 뒷모습을 쫓았다. 어디를 가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걸었지만 망할 신호음만 갈 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매사 여유롭고 심지어 능글맞기까지 한 그가 이렇게 급히 달려가는 이유가 뭘까.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책상에 턱을 괴고 앉아 문자를 넣었다. 어디가? "왜 답장이 안와." 손톱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입술을 깨물던 성종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일이 터진건가? 안 그래도 한창 학교 홈페이지에 올라온 사진으로 뒤숭숭한 학교인데 우현에게도 무슨 일이 일어 난 건 아닌지. 학교가 소란스러운 틈을 타 건물을 빠져나왔다. 막 교문을 나가고 있는 우현을 보고는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아, 진짜 달리기 제일 싫은데. 투정을 부리면서도 발을 조금 더 빨리 놀렸다. 지금 제가 왜 달리고 있는 지 조차 알지 못하고 그냥 우현의 뒤를 따라 달렸다. 몇 개의 횡단보도를 건너고 코너를 돌아 도착한 곳은 큰 병원 앞이었다. "…남우현이 이런 데를 왜?" 이미 병원 입구로 사라져버린 우현이었지만, 성종은 큰 병원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무서운 것도 같은 병원으로 조금씩 걸음을 떼어 건물 안으로 들어간 성종은 잠깐의 시간차로 우현이 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것을 보았다.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점점 올라가더니 5층에서 멈추었다. 성종의 눈이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 옆에 부착된 병원 건물 내부 표시판으로 향했다. 5층. 정신과, 신경외과, 그리고…영안실. "……." 썩 좋은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조심스럽게 5층을 눌렀다. 병원에는 존재하지 않는 층. 4층. 그러므로 5층은 즉 사층을 뜻한다. 좋지 않은 예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림과 동시에 튀어내리 듯 내린 성종은 들려오는 울음소리와 그에 섞인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꼭 감았다. "…하아…." 늘 그랬다. 좋지 않은 예감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 * * 그대로 학교를 빠져나간 성규는 바로 두준에게 연락을 걸었다. 요란한 컬러링이 몇십초간 들린 후에야 두준이 전화를 받았다. - 어쩐 일이야? 그날 이후로 연락도 안하더니. "네 짓이니?" - …뭐가? "네 짓이냐고!! 사진!! 대체, 대체 언제……." 또 다시 눈물이 왈칵, 하고 터져나온다. 성규가 그 뒤의 말을 잇지 못했으나 두준은 성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를 알아챘다. 이내 두준이 피식, 하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 내가 찍은 건 아냐. "……." - 하지만,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지. 그 말은,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이 두준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는 소리와도 같았다. 성규는 바들바들 떨면서 배신감에 몸부림쳤다. 니가,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런 짓을……. "니가 어떻게…!!" - 김성규, 내 신조가 뭔지 알아? "…뭐?" - 내가 못 가지면, 남도 못 가진다. 두준의 말에 성규는 허, 하고 허탈한 듯한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나를 이렇게까지… 이해할 수 없다. "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 아냐? 내가, 내가 얼마나 선생님이 되고 싶어했는지는 니가 더 잘 알거 아냐!! 그런 니가 어떻게, 어떻게 나를 학교에서 매장시킬 생각을 해!! 너한테는 내 꿈이 그렇게나 보잘 것 없었어? 너의 그 미친 집착 때문에 내 꿈을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을 정도로 그렇게 하찮았던 거냐고!!" - ……. "오만 정 다 떨어진다 진짜… 니가 이러면 내가 너한테로 다시 돌아갈 것 같았어? 아니, 틀렸어." - 김성규…. "너랑은 이제 정말 끝이야, 다신 나한테 연락할 생각 하지마. 이 씨발 새끼야."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린 성규는 계속 참아왔던 눈물을 터트렸다. 이제 다… 끝났다. * * * "남우현…." 성종이 조심스레 우현을 부르자 주저앉은채로 흐느끼던 우현이 고개를 들어 성종을 바라봤다. 뭐야, 이년이 왜 여기에… 우현은 황급히 눈물을 닦으면서 일어났고 이내 헛기침을 하면서 성종에게 말했다. "너 미쳤냐? 학교는 어쩌고 왜 여기까지 와!" "……." "이게, 너 대답 안해? 왜 여기까지 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지만 지금 우현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억지로 울음을 참는 모습은 애잔해보이기까지 했다. 성종은 망설임 없이 우현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서는 바로 우현을 끌어안았다. 성종이 갑자기 저를 끌어안자 우현은 하던 말을 멈추고는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너, 너 뭐야!!" "센척하지 말고 그냥 울어." "…뭐?" "그냥 울라고!! 너 지금 엄청 슬프잖아!! 너네 아버지 돌아가셔서 울고 있었잖아!!" 성종의 말에 우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슬프다고? 아닌데, 난 오히려 해방되어서 너무 좋은데. 그런데 왜……. "흐으, 끕, 으윽, 하… 씨발!!!" 왜 이렇게 눈물이 봇물 터지듯이 나오는 걸까. * * *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았다. 평생을 하나의 목표를 바라보며 살아왔던 나에게 지금 닥쳐온 현실은 끝없는 슬픔만을 안겨주었다. 더 이상 버티고 서 있을 재간이 없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이 순간마저 힘이 부치다면 믿을까. 성규는 헛웃음을 지었다.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제 모습이 초라하고 형편없기 짝이 없어 그냥 픽 웃어버렸다. 그리고 함께 반사되는 인형. "…김…명수?" "이럴 줄 알았어요." 성규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저를 따라오고 있었는데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니. 제가 그렇게나 둔한 사람이었던가 싶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명수를 보고 있을 면목이 없었다. 그런 사진들과 그런 대우. 이제 곧 학교를 떠나와야 하겠지. 교사로서는 해서는 안될 짓을 한 거였으니까. 저의 개인적인 성적 취향따위를 앞뒤가 꽉막힌 그 사람들이 이해를 해 줄리가 없었다. 다시금 차오르려는 눈물에 고개를 젖혔다. "하아…." "지금 나 보기 껄끄럽죠?" "……." "알아요. 김성규씨 마음." "선생님이라고 해." "여기는 학교 아니잖아요." "…김명수."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선생 김성규보다 이런 인간적인 김성규가 더 좋은데." 빙긋 웃어버리는 명수를 무섭게 노려보던 성규는 이내 표정을 풀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래, 이제는 선생님도 아니니까. 조용히 내뱉어진 말에 명수는 얼굴을 굳혔다. 큰 보폭으로 성규에게 다가가 그의 허리를 끌어 당긴 명수는 성규의 뒷머리를 붙잡고 입을 맞추었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랄 새도 없이 티셔츠 밑으로 명수의 손이 타고 들어와 성규의 허리를 쓸어 내렸다. 놀란 성규가 몸을 비틀었지만 강하게 안고있는 명수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혹시 명수가 저를 쉽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학교 홈페이지에 올라온 사진으로 인해 자신을 어렵지 않게 눕힐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 건 아닌지. 화가 난다는 것 보다는 속이 상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손가락질과 모욕은 견뎌낼 수 있었지만 명수가 그러는 것은 이상하게도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아!" "…하아…하아." 명수의 혀를 세게 깨문 성규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수를 바라보았다. 아무 표정이 없는 명수를 보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던 성규는 눈을 지그시 감고는 물었다. "나 걸레같아?" "……." "너 내가 지금 창년처럼 보이는 거야? 그래? 쉽게 다리 벌리게 할 수 있을 것같아?" "…김성규." "왜! 이제는 내가 만만해! 어? 그런거냐고!" "그런 표정 짓지 마요. 그리고 그렇게 아파하지도 마요. 내가… 내가 너무 아파서 그래요." 곧은 명수의 눈을 보며 성규는 입을 다물었다. 성규를 보며 제가 아프다고 말하는 명수를 향해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뛰었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명수에게 안기고 싶어하는 저를 알아채고는 이젠 이상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대로 다가가 명수를 안고 가슴에 얼굴 묻었다. "나, 나는… 난 진짜,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는데……." "알아요, 잘 알고 있어…." "…나 너무 힘들어." 제 머리를 쓸어내리는 손길에서 끝없는 다정함이 느껴졌다. 이내 명수에게서 조금 떨어진 성규가 조심스레 물었다. "학교, 안가봐도 돼?" "지금은 당신이 더 중요해요." "부모님이 아시면 어쩌고…." "그 사람들은 내 친부모 아니니까 상관없어요." "……." "지금 김성규한테 필요한 건 나잖아요. 아니에요?" 아니, 맞아. 성규는 슬프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의 나는 네가 필요하다. * * * 학교 안이 어수선했다. 그러나 호원은 여전히 저를 모른 척하는 성열 때문에 마음이 더 어수선했다. 게다가 오늘은 동우도 조금 이상했다. 저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시종일관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왜 그러냐 물어도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하, 진짜. 친구나 애인이나 왜 다들 내 속을 썩이지 못해서 안달인 거냐고. 결국 참다 못한 호원이 성열이 앉은 자리로 다가가 다짜고짜 성열의 손목을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그대로 화장실로 끌고 들어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성열은 멍한 눈으로 호원을 쳐다봤고, 이내 호원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성열에게 말을 걸었다. "나 계속 이런 상태로 지내는 거 싫어." "……." "게다가 너 하나로도 벅찬데 오늘은 동우 형까지 왜 그렇게 죽상인지… 미치겠다 진짜." 호원의 푸념섞인 말에 성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동우가 그런 것은 다 저 때문이리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밝았던 사람이 우울해질 정도면…… 인상을 쓰면서 한참을 고민하던 성열은 이내 어렵사리 입을 떼면서 말을 꺼냈다. "호원아." "…왜." "너, 동우 형 얼마나 좋아해?"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호원이 되묻자 성열이 다시 보채면서 대답을 요구했다. 그러자 호원이 쩝, 하는 소리를 내면서 대답했다. "어린 놈의 치기어린 대답일지도 모르겠는데…." "……." "형은, 내 심장 그 자체야." 아아, 그렇구나. 너는 그만큼이나 형을 좋아하는구나. 그러면 내가 들어갈 자리같은 건 정말로 없겠구나. 단 1mm도 존재하지 않는 거구나. 그래, 이거면 됐다. 성열이 쓰게 웃었다. "…잘 알았어." "뭐야? 뭘 알았다는 건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본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만 들어가자. 수업시간 다 되간다." 이번에는 성열이 먼저 호원의 손을 잡아끌었다. 마음은 미칠 듯이 아파왔지만 조금은 후련하기도 했다. 그래, 내 마음만큼이나 동우 형을 생각하는 네 마음도 소중하니까…… 그 마음에 흠집이 나지 않도록 지켜줄게. 내 마음, 영원히 묻어둘게. "…너 우냐?" 어깨를 들썩이는 성열의 뒷모습을 보던 호원이 물었고, 그에 성열은 황급히 눈물을 닦은 뒤 뒤를 돌아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 너 때문에 우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 * * 얼마나 운건지 제풀에 지쳐 잠이든 우현을 보며 성종은 쓰게 웃었다. 제 무릎을 베고 누워 잠이든 우현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있었다. 미워하는 줄 알았더니, 이렇게까지 울줄이야. 그래도 단 하나뿐인 핏줄이라서 그런지 우현은 참 서럽게도 울었다. 저와는 다른 환경 속에서 억척스럽게 살아왔을 우현이 떠올랐다. 잠들어 있는 우현의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긴 성종은 찬찬히 우현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나름… 잘생겼네."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성종은 그러고보니 왜 자기가 이곳에 앉아서 이렇게 우현을 보고 있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충동적으로 우현의 뒤를 따라 오기는 했는데, 그게 왜 인지 명확하기 않아서 답답했다. "이게 다 이 자식이 좋아하네 마네. 그딴말을 지껄여서 그래." 자고있는 우현의 이마로 살짝 알밤을 놓은 성종은 지친 우현의 얼굴을 보며 제 가슴이 쓰리는 것을 느꼈다. 왜 제가 자꾸 우현을 신경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눈길이 가는 것은 사실이었다. 좋아한다는 고백을 들은 후 부터는 조금 더. 성종은 조금 진지한 얼굴로 잠든 우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너라면… 내 어긋난 사랑을 돌려 줄 수 있을까?" "……." "너라면 내가 조금 기대어도… 웃어줄 수 있을까?" "……." "너라면… 내 사랑을 받아 줄 까?" 대답이 돌아올리가 없는 물음이었다. 여전히 잠들어있는 우현을 보며 성종은 가만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 세상에 혼자 남게 되어버린 어린 강아지를 이제는 제가 거두어 줄 때도 됬다고 생각이 들어서였다. 여기저기 상처 가득한 우현의 주먹을 감싸 쥐었다. 우현 만큼이나 다부진 주먹이었고, 상처가 많은 주먹이었다. 성종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쯤 하면, 나도 행복할 때가 됐다. * * * 우는 성열을 겨우겨우 달래 보낸 뒤 동우의 기분은 쭈욱 좋지가 못했다. 왜 진작에 눈치를 못 챘을까 하는 자괴감과 그럼에도 여전히 호원을 원하는 제 마음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래서 호원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아침방송도 평소 때와는 다르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진행했다. 2학년 후배가 선배 목소리 왜 그러냐면서 걱정어린 타박을 할 정도로 동우의 기분은 상당히 바닥을 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렇게 멍하니 있다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오늘은 혼자 먹겠구나, 싶어서 힘없이 걸어가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저를 붙잡는다.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니 그는 다름아닌 호원이었다. "호, 호원아!" "진짜 오늘따라 왜 이래요? 형이 기운없으니까 나까지 기운 없어질라 그러네." 호원의 말에 동우는 또다시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러니까, 그게… 대체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야 하는 걸까. 감조차 잡히질 않는다. 그러나 동우가 왜 이러는지 알 길이 없는 호원으로서는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형이 이러면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미안." "후, 그래도 성열이 그 자식이랑은 화해했어요." "어? 뭐?" 화해? 성열과 화해했다는 말에 동우의 눈이 커졌다. 그에 호원은 놀라면서도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갑자기 뜬금없이 그걸 묻더라고요. 형을 얼마나 좋아하냐고? 그래서 뭐 나 생각하는 대로 대답했더니 잘 알았다, 라고 말하더라고요. 뭔 소린지… 그래도 화해는 한 것 같아서 기분은 좀 홀가분해요." "성열이가… 그래?" "…네, 그러니까 형도 이제 그만 기운 좀…… 울어요?"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물을 보이는 모습에 호원이 크게 당황했다. 아니, 갑자기 왜?! 으아 미치겠네!! "갑자기 왜 울어요! 네?" "흐, 흐으… 성열아, 성열아, 허으… 미안해." "하아…." 대체 왜 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달래줘야겠다는 생각에 호원이 동우를 끌어안고 등을 두들겼다. 그럼에도 동우는 쉽게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성열이가, 성열이가 제 마음을 포기했구나. 나와 호원이를 위해 영원히 숨기기로 결심을 했구나. 많이 아플텐데, 정말 많이 아플텐데 순전히 우리들을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린 성열이에게… 미안하면서도 고맙다. 아아, 고맙다고 생각해버리는 제 자신이 너무 싫었다. 간신히 울음을 그친 동우가 호원을 바라보면서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성열이한테 진짜 잘해줘야돼." "……." "안 그럼 벌 받아, 진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호원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 아이가 날 도대체 어디로 이끌고 가는 거지. 성규는 아무 말 없이 저의 손을 꼭 잡고 길을 걷는 명수를 뒤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보는 시선이 많아 서로 꽉 잡은 손이 부담스러우면서도 불편하였지만 맞댄 온기에 느껴지는 그 풋풋한 사랑의 설렘이란. 장난이라도 하듯 '슬픔'과 '분노'를 잊게 해주었다. "명수야." "네?" "미안." "..." "그리고 고마워." 김성규니까 그런 말 필요 없어요. 멋쩍었는지 콧등을 긁적이며 명수가 입을 열었다. 뭐라고? 성규의 장난스러운 되물음에 결국 얼굴이 붉어지더니 포개어놓았던 손을 움직여 깍지를 꼈다. 다섯 손가락이 다 느껴져서 그런가. 아까보다 세찬 심장박동소리에 성규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어느 때 보다 환하고 밝은 미소가. 성규는 잠시동안이지만 이 시간이 조금만 더 천천히 가길 바라고 바랬다. "그나저나 우리 어디 가?" "데이트하러요." 명수의 한 마디에 성규는 저의 얼굴이 붉에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 오늘 날씨가 참 덥구나 하하하. 부자연스러운 웃음소리와 연신 손을 펄럭이던 성규와 날개를 펄럭이는 병아리가 겹쳐졌다. 이를 본 명수는 저의 가슴 한 켠이 어린 시절 로맨스 소설을 읽은 소녀마냥 간질간질한게 어색해 셔츠 위를 긁었다. 모기 물렸어? 성규의 물음에 고개를 젓는 것으로 답을 했다. 모기라니.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저런 귀여울 줄이야. 깍지를 낀 손을 잡으며 명수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렇게 기쁠 때 가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명수의 대답은 여전히 아니요, 였다. 확신할 만큼 이리 일분일초가 소중하고 즐거웠을 때가 없었으리라. 어느새 저의 가슴 한켠을 뒤집어 놓은 병아리는 분홍빛 얼굴을 한 채 제 옆에 졸졸졸 걷고 있었다. "뭐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어,어? 뭐하지.. 글쎄." "시시하게." "그래도 명수, 너랑 가는 곳이면 왠지 다 좋을 것 같아." 도저히 아까 엉엉 울부짖던 사람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성규의 얼굴은 웃음꽃이 한 가득이였다. 웃으니까 얼마나 예쁘고 보기 좋아요. 생각한 말이 입으로 튀어나왔다. 당황스러움에 흠칫하며 명수를 바라보는 성규와 쪽팔림에 시선을 바닥으로 옮긴 명수는 곧이어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커다랗게 웃어버렸다. 더위 먹은 사람들인가, 싶을 정도로 웃던 둘은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닦으며 지긋이 서로 바라보았다. 하하하, 너 때문에 내가 못 살겠다. "김성규 넌 부끄러워했으면서." "당연히 그렇게 말하는데 부끄럽지! 내가 그렇게 예뻤어?" "..." "에이, 아닌가 보네." "..예뻤어." "뭐라고 안 들려, 명수야. 안 예쁘다고? 못 생겼다고?" "아씨.. 세상 누구보다 아름답고 빛이 났다고요, 김성규씨." 농담이었는데 진지함이 가득한 얼굴로 말을 건내는 명수를 보니 또 콩닥콩닥 뛰는 가슴에 입을 꾹 다물었다. 명수야 내가 정말 그래? 네. 따스한 햇살이 성규와 명수를 감쌌다. * * * 꿈을 꿨다.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는 아득한 그 옛날, 이제는 생각조차 나지도 않는 아버지의 웃음소리. 그 소리가 귓가에 멤돌기 시작했다. 우현은 숨을 가쁘게 내쉬며 겨우 참았던 울음을 다시 한 번 토해냈다. 아버지… 아버지. 끝까지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던 말들이 이제서야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어느 새 잠이 들었던 성종이 옆에서 들려오는 큰 울음소리에 깜짝 놀라 허겁지겁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남우현!" "…씨발! 왜, 왜. 왜 이렇게… 이렇게 가는게 어딨어. " 성종이 우현의 손을 꽉 잡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아, 괜찮아. 우현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린다. 우현이 잡히지 않은 손으로 제 가슴을 퍽퍽 쳐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잠잠해진 우현의 몸을 천천히 눕힌 성종이 한숨을 푹 내쉬며 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 * * "정신이 좀 들어?" "…이, 성종?" 꿈에서 깨어난 우현은 눈 앞에 보이는 성종의 모습에 당황한 얼굴을 해보이는 것도 잠시 이내 그의 품에 안겨 울던 제 모습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성종은 베시시 웃으며 시선을 피하는 우현을 바라보았다. 퉁퉁 부운 그의 눈두덩이를 차가운 제 손으로 꾹 누른다. 우현이 움찔, 뒷걸음질을 치며 성종의 손목을 잡았다. "눈부었다. 많이." "너, 왜." 우현이 뻥진 표정을 지어보였다. 성종이 우현에게 잡힌 제 손목을 풀어내리고선, 그의 투박한 손을 꽉 잡아왔다. * * * 벚꽃이 이미 지고 없음에도 성규가 벚꽃나무가 맞은 여의도 쪽으로 가자 조르자 명수는 알았다면서 성규를 이끌었다. 지하철을 타고 여의도에 도착한 두 사람은 벚꽃나무가 제일 많은 윤중로 쪽을 걷기 시작했다. 봄이긴 했지만 날이 날이다 보니 벚꽃은 이미 다 지고 푸른 잎만 무성하게 나 있었다. 그럼에도 성규의 표정은 마치 만개한 벚꽃이라도 본듯 환했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 벚꽃은 이미 다 지고 없구만." "그냥, 그냥 좋아." 그냥 좋다는 말에 명수는 실없이 웃었다. 그래, 그래도 좋다고 말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제 버찌가 열리겠지? 성규의 말에 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 그거 한번 따먹고 싶어서 나무를 타고 올라가려다가 떨어진 게 여러번이었는데…… 옛 추억을 말하면서 웃던 성규의 얼굴에는 어느새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 이렇게 웃고 떠들 땐가. 이제 학교에서 잘리는 건 시간문제인데다가 그 사진 때문에 다른 학교에서도 저를 써주지 않을 것이다. 결국 영원히 교사로서 활동하게 될 수 없게 된거나 다름없었다. 정말 나를 철저하게도 짓밟아놨구나, 윤두준. 이게 니가 말했던 사랑이니? 그 사랑 한번 참 무섭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너한테 마음조차 주지 않는 거였는데… 성규의 눈가에서부터 흘러나온 눈물이 소리없이 툭, 떨어졌다, "…이제 어떡할까?" "……." "난 이제 영원히 선생노릇 못하게 생겼고, 너 무단조퇴한 거 지금쯤이면 네 부모님이 아셨을 테고… 막막하다 진짜." 이 답답함을 대체 뭘로 표현해야 할까? 살길조차 막혀버린 지금, 성규는 제 마음을 짓누르는 이 무거움이 너무나도 버거웠다. 망연자실한 눈으로 허공을 보는 성규의 모습을 바라보는 명수 또한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다. 아무리 지켜주고 싶다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오히려 성규가 명수를 지켜줘야 할 판이다. 명수는 아직 어렸다. 지켜줄 수 있는 입장이 되지를 못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조차 쉽게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을 내뱉는 것조차 무책임하다 생각할 까봐서. 지금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손을 잡아주는 것뿐이다. * * * "뭐라고요? 성종이가 무단조퇴를요?!" "그래, 아까 애들한테 물어보니까 남우현 따라서 나갔다 그러던데? 가방도 안 들고. 근데 방금 전에 연락이 왔더라고, 남우현네 아버지가 공사장에서 추락사해가지고 남우현 그 놈이 지금 병원에 있다고. 아마 밤쯤에 빈소가 마련된다나?" "…저, 성종이 나간 거 저희 부모님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부탁할게요 쌤." "뭐, 원래 그러던 녀석이 아니니까 이번 한번은 봐주기는 하겠는데…." 한번은 봐준다는 말에 성열은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연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는 교무실을 나섰다. 남우현을 따라 나갔다라. 성종이가, 정말로 그 녀석한테… 마음이 있는 건가? * * * 하교를 하는 도중에도 여전히 동우의 기분은 나아지지가 않았다. 성열의 마음을 알아 차렸을 때는 그에 대한 미안함이 커서 그랬는데, 이제는 고마움으로 번져서 였다. 저를 바라보고 있는 호원을 힐끗 보고는 살짝 웃어주고,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며 울상을 지었다. 과연 성열의 얼굴은 제대로 볼 수 있을지. 아마 미안해서라도 잘 보지 못할 것 같은데 말이다. "형, 정말 왜그래요?" "으,응? 뭐가?" "오늘 하루종일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나한테 말 못하는 거예요?" "...그런거 아니야." "그럼 왜 그러는 데요?" "호원아." 제 이름을 가만히 부르는 동우에 호원은 입을 다물었다. 동우는 잡고 있던 호원의 손을 꼭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동우의 행동에 의아스러웠지만, 이유를 묻지 않았다. 겉모습은 한없이 밝고 활기 찬 동우였지만 속내는 누구보다 깊고 상대를 생각하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호원도 동우가 꼭 붙잡은 손을 맞잡았다. 걷던 걸음이 멈춰지고 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교차되었다. "호원이는 나 사랑하지?" "당연하죠." "그럼 성열인?" "네?" "성열이는 사랑해?" "그 녀석은 친구니까 좋아하는 게 맞죠. 갑자기 왜요?" "호원아. 성열이도 사랑해줘. 나한테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더라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친구로. 없으면 안될 그런 친구로. 응?" 참 난감하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부탁이었다. 호원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해할 수 없는 동우의 행동과 말. 그리고 성열까지. 이 사람들이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알았다며 몸을 돌려 계속해서 길을 가려는 동우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동우가 놀란 눈으로 돌아보자 호원은 단단한 얼굴로 동우를 바라보았다. "뭐에요?" "어?" "숨기지 말고 말 해요. 뭐에요? 지금 형이랑 이성열,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잖아요. 아니에요?" "호, 호원아. …수, 숨기는 거 없어." "형 거짓말하면 말 더듬는 것도 다 알아요. 뭐에요? 뭔데 나한테 이렇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숨겨야 하는 건데요?" 호원의 재촉에 동우는 입술만 깨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호원의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호원, 그만 해. "이성열?" 책가방을 한 쪽 어깨에 걸쳐 맨 성열이 호원을 보고 있었다. 원래 성열은 한참 전 갈림길에서 다른 방향으로 갔어야 하는 게 맞았는데, 어째서 지금까지 동우와 호원을 따라온 건지. 호원은 고개를 살짝 갸웃 거렸다. "뭘 그만 해야하는데?" 본의 아니게 말이 날카롭게 튀어 나갔다. 호원은 제가 뱉은 말에 놀라 입을 다물었지만, 성열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동우는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호원은 알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의 기류에 입을 다물었다. 저만 빼고 두 사람은 알 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 확신이 서고 있었다. "지금 나만 왕따시키는 거야?" 잔뜩 불편한 기색을 말을 내뱉는 호원의 모습에 동우는 물론이고 무표정하게 있던 성열마저 놀란 모습을 보였다. 왠지 모르게 화가 났다. 무엇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냥 화가 났다. 이내 호원이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래, 둘이 실컷 비밀얘기 나눠. 난 빠져줄 테니까." "호, 호원아!!" 뒤늦게 동우가 호원을 붙잡으려 했지만 호원은 저를 잡아오는 동우의 손길마저 뿌리친 채 그대로 가버렸다. 동우의 얼굴은 금세 울상이 되었고 성열은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동우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흐, 흐으… 어떡해? 응? 성열아, 어떡하지?"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 줄은 미처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과연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성열은 말없이 동우를 위로했다. * * * 빈소에는 제법 많은 인원이 왕래했다. 비록 학교에서 온 교사들과 학생들이 전부이긴 했지만 말이다. 우현은 묵묵히 그들을 맞으면서 상주 노릇을 다 했고, 가식인지 진심인지 모를 그들의 조문에 일일이 감사를 표했다. 성규가 온 것은 조금 늦은 오후가 됐을 때였다. 다행히도 학교에서 보낸 사람들이 더 오지 않게 되었을 때 성규가 빈소에 찾아왔다. "우현아…." "…안 오실 줄 알았는데, 어떻게 오셨네요." "미안해, 내가 너한테 도움이 못된 것 같아서…." "괜찮아요, 나 같은 놈한테 신경써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걸요." 그 말에 성규는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이내 영정사진 앞에 절을 하고 향을 꽂아넣은 성규가 우현에게 말했다. "근데 이제는 선생님 앞길도 막막해서 도와줄 수가 없겠다." "그런 말 하지 마요, 선생님은 충분히 나 도와준거나 마찬가지니까." "우현아…." "선생들 중에서 아무도 나를 신경써주지 않았어요. 그냥 이 녀석은 구제불능 문제아다, 이렇게만 생각하고 날 혼내기만 했지… 그러니까 너무 죄책감 같은 거 갖지 마요. 선생님은 충분히 나 도와줬어요. 그날 먹여주고 재워준 것만 해도 얼마나 크게 도움받은 건데요." 제가 우현을 위로해야 하는데 오히려 우현이 저를 위로하고 있었다. 성규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문득, 선생 노릇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모 고등학교 남교사의 문란한짓이 담긴 나체 사진이 학교 홈페이지에 버젓이 나돌아 다녔다는 사건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 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사건은 인터넷을 통해 일파만파 퍼져 나갔고, 학교측에서는 도저히 이 사건을 덮어 둘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닫고야 말았다. 교육청에서는 성규의 교사 자격 박탈과 관련된 얘기가 오갈 정도로 사태가 극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 제가 그만 두겠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켜 죄송할 따름입니다. " 성규가 그 말과 함께 교장의 앞에 사직서를 내려 놓았다. 교장은 제 안경을 고쳐 쓰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누구보다도 성실했던 김교사가 이런 일에 휩쓸린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마음 같아선 성규를 붙잡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것을 알고 있었다. 성규는 교장에게 허리를 숙여 정중히 인사한 뒤 교장실을 나섰다. 태연한 표정으로 교무실을 나서는 순간, 성규의 입에서 후우, 하는 한숨이 흘러 나왔다. 후련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교사로써 첫발을 내딛었을때의 일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교사로써의 인생은 끝이구나, 라는 생각이 드니 아쉬운 마음이 드는건 어쩔 수 없는듯 싶었다. 성규는 복도를 거닐며 한참 수업에 열중인 교실안 학생들의 풍경을 마음속 깊이 새기며 찬찬히 걸음을 떼었다. 그래, 이제 끝이다. 쿨하게 잊자, 김성규. 그렇게 제 자신에게 힘을 복돋아 넣으며 학교 건물을 나섰다. 건물을 나서는 순간, 모든게 끝이구나, 라는 현실의 감촉이 생생히 전해져 오는듯 했다. 그렇게 건물을 나서 학교 정문을 나서려는 순간, 누군가 성규의 앞을 막아섰다. 걸음이 자연스레 멈추어짐과 동시에 성규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 김명수? 너 뭐야? 지금 한참 수업 시간 아니야? 왜 여기에 있는거야? " 성규가 놀란 눈을 하고 되물었고, 명수는 아무런 말 없이 굳은 표정으로 성규를 응시했다. 가끔씩 아무말 없이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명수의 저런 행동을 잘 알고 있었고 익숙해 질때도 되었지만, 저를 바라보는 저 깊은 눈동자는 도저히 익숙해지질 않았다. 성규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고 그런 성규를 바라보기만 하던 명수가 슬핏 웃어 보이며 입을 뗐다. " 저도 지금 막 자퇴서 내고 왔어요. " " 뭐.. 뭐라고?! " 명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이였기에 성규는 놀란 기색을 감출수가 없었다.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자퇴서? 김명수 너 미쳤어?! 돌았냐고! 성규가 언성을 높이며 명수를 쏘아 붙이기 시작 했다. 어느정도는 예상 했던 성규의 반응에 명수의 얼굴에도 어느샌가 웃음기가 싹 가셨다. " 지금 당장 학교로 돌아가!! " " 싫어요. " " 김명수!! " 명수는 성규의 말을 단칼에 잘라 내고는 몸을 돌려 세웠다. 그리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명수의 걸음이 점점 빨라 지기 시작했고, 성규는 재빨리 그런 명수를 뒤따랐다. 왜,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내가 뭐라고, 내가 뭐 그렇게 좋아서 자퇴서까지 내고 자기 인생을 포기하려고 하냐고!! 간신히 명수를 따라잡은 성규가 명수의 손목을 잡고 돌려세웠다. 숨이 막 차오른다. 명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성규를 노려봤고 성규는 그런 명수를 똑바로 응시하다가 이내 눈물을 삼키면서 말을 건넸다. "나, 니 인생 망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제발… 응?" 이대로 정말 그만둬버리면 나는 평생 죄책감 속에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이 나쁜 자식아. 성규가 기어이 울음을 터트리자 명수는 이를 악물면서 성규를 제 품에 꽉 끌어안았다. 제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그러지 말라면서 고개를 가로젓는 게 느껴지자 명수는 하, 하고 짧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흐으, 제발, 안돼…." "내 인생, 망치지 않았어. 오히려 당신이 날 구원한 거야." "하아, 명수야…." "나, 이제 파양당할지도 몰라요. 그 사람들 기대에 아주 거스르는 행동을 했으니까. 그러니까 나 이제 혼자야." 그렇게 말하는 명수의 입가에는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성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파양 당한다는 말을 웃으면서 할 수가 있지? 그래도 저를 거둬주고 키워주신 분들인데… 그러나 그때 병원에서의 일을 생각해보면 완전히 이해를 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호적에 입적하기만 했지 진정으로 따뜻한 사랑을 주면서 키우지는 않았을 거다. 그렇게 삭막한 곳에서 사는 동안 이 아이는 사람의 따뜻한 온기라곤 전혀 모르고 살았겠지. 간신히 울음을 그친 성규가 천천히 명수에게서 떨어졌다. 저를 보는 명수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단했다. 비록 나이는 저보다 어렸지만 심지는 저보다 더 곧았다. 이내 명수가 말했다. "무책임하게 내가 먹여살린다는 말은 안할게요." "……." "하지만, 언제나 옆에 있어줄 수는 있어. 이 손, 계속 잡아줄 자신은 있어." 잡고 있던 손을 번쩍 들어올려 환하게 웃으면서 말하는 모습에 성규는 바람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졌어." "……." "내가 너한테 졌다, 김명수." 도저히 떼어낼 수도 없고, 그럴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맞잡은 손이 더 단단해졌다. * * * "이호원" 누군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방금 전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성열은 여전히 아주 작은 미소를 미세하게 달고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청승맞게 옥상에 쭈그려앉아있냐, 이호원 답지않게"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자,성열이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동우형한테 사과해" "내가 왜 그래야하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지금이라도 동우에게로 가 무릎꿇고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을 호원은 이미 알고있었다. 그러나 오기때문일까, 아니면 아직도 제 분이 풀리지않아서일까 성열에게 꼭 듣고싶었다. 동우와 성열이 그렇게 숨기며 안절부절 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를.그것을 듣고서야 동우에게로 가 당당히 사과 할 수 있을것만 같았다. "동우형 지금 울고있어. 알아? 안그래도 동우형 눈물 내가 다 빼놓은것같아 속상했는데, 이번엔 너때문에 울고있다고 이자식아" 흐트러진 표정을 감추기엔 호원은 성열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성열이 동우형의 눈물을 다 빼놓았다고? 도데체 왜? "그게…무슨소리야? 동우형이 울었다고? 너때문에?" 성열은 기어이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마침내 올것이 왔구나 싶은 기분이었다. 호원에게만은 제 마음을 끝까지 숨기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면 빠져나갈 방법이 그 어디에도 없었다. 괜찮아, 이성열. 넌 괜찮아. "동우형 나때문에 너한테 그렇게 무뚝뚝하게 대한거야" "……" 성열의 표정이 한없이 슬퍼보였다.무엇을 그렇게 말하기 곤란한건지 답답한 마음에 호원이 다시 한번 물어보려는 찰나, "동우형이 알아버렸거든, 내가 너 좋아하는거" 호원은 믿을수없다는 듯 성열을 바라보았다. 지금 성열이 무슨 말을 한것인가. 아니, 성열은 자신이 지금 내뱉은 말이 무엇인지나 알까? 호원이 당황해 하는 사이 성열은 짦게 숨을 들이켰다. "이제와서야 이런말 하는거 미안한데, 나 네가 동우형 좋아하기 훨씬 전부터 너 좋아했어.근데 차마 너한테만큼은 말 못하겠더라. 네가 나한테 다정하게 대해줄때마다 두렵더라고. 다시는 널 친구로서라도 못 보게될까봐" 진짜 바보같지? 태연한 척 말하는 성열이 한없이 안쓰러워보였다. 왜 눈치 못 챘을까, 성열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자기와는 조금 달랐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둔한 자신을 꾸짖으며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하지, 고맙다고? 아니면 미안하다고? "동우형이 내 마음 알고 나 대신 엄청 울어줬어. 미안하데, 정말로 미안해야 할건 난데 그 바보같은 사람이 울면서 나보고 미안하데"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울면 안돼는데,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데. "이제 동우형한테 사과할 마음이 드냐?" "이성열" 미안하다, 호원이 그 말을 내뱉으며 옥상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던 성열은 맑게 개인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미안한거 알긴 아나보네" 그 말을 하는 성열의 얼굴에서 옅은 미소가 흘러 나왔다. * * * 이제 내일이면 발인이다. 우현은 허탈하게 한숨을 한번 내쉬면서 영정사진을 바라봤다. 그렇게 허무하게 뒤져버릴 거면 진작에 좀 착하게 살지 그랬어, 이 몹쓸 인간아… 이제 더 이상 빈소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들은 말에 의하면 성규는 학교를 그만둔 뒤 그대로 자취를 감추었다 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명수가 자퇴서를 내고 행방이 묘연하다고 했다. 어제 오후쯤에 온 같은 반 녀석에게서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우현은 허, 하고 실없는 웃음만 나왔다. 그 지독한 공부벌레가 자퇴라니… 오히려 자퇴는 내가 해야 되는데 말이야. 그나저나 김성규는 괜찮으려나. 선생질 못하면 이제 뭘로 먹고 살라나? "…남우현?" 저를 부르는 낭랑한 목소리에 우현이 고개를 들었다. 성종이었다. 성종은 동그란 눈을 예쁘게 깜빡이면서 조심스레 신발을 벗고 빈소 안으로 들어섰다. "왜 그렇게 구석에서 쭈그려 앉아있어, 나 너 없는 줄 알았잖아." "넌 허구한 날 여기밖에 올데가 없냐? 니네 집 안가?" "집 들렀다 오는 거거든? 봐, 교복 아니고 사복이잖아!" "…참나." 우현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자 성종은 입을 삐죽 내밀면서 우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우현의 뺨을 슬며시 어루만졌다. 그새 수척해져 움푹 패인 뺨이 보기 안쓰러웠다. "완전 아저씨같아." "뭐 임마?" "바깥바람이라도 좀 쐬자. 너 계속 여기 안에만 있었지? 이제 올 사람도 없으니까 잠깐 정도는 바람 쐬도 괜찮잖아, 응?" 성종이 우현의 팔을 잡고서 조르듯이 말하자 우현은 마지못해 알았다고 대답한 뒤 성종이 이끄는 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빈소를 나섰다. 장례식장 밖도 빈소만큼이나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성종은 두 팔을 벌리면서 찬 바람을 쐬었고 우현은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은 채 눈을 살며시 감았다가 떴다. 얼마만에 나와보는 바깥이냐. "…내일이 발인이지?" "어." "……." "안 와도 돼. 아니, 그냥 오지 마라." 단호하게 오지 말라는 말에 성종은 짐짓 화난 얼굴을 하면서 대답했다. "올 거야!" "뭐?" "와서 니 옆 지켜줄거야! 어차피 내일 놀토야!" 당돌하기 짝이 없는 성종의 말에 우현은 코웃음을 쳤다. 이게 지금, 누굴 지켜준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성종의 말에 기어코는 우현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버렸다. 성종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채 그런 우현을 바라 보았다. 뭐야, 갑자기 왜 웃지? 내가 뭐 말 실수라도 했나? 성종이 고개를 갸웃 거리며 눈을 껌뻑 거렸고 우현이 손을 뻗어 성종의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 고맙다…. " 마치 강아지를 어루 만지듯 제 머리를 헝클이는 우현의 행동에 기분이 상한것도 잠시 우현의 입에서 나온 고마워, 라는 말 한마디에 성종은 한참동안 멍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고맙다라는 말, 우현이 제게 저런 말을 할거라곤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이내, 성종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아직은 많이 서툴었지만 이제 남에게 저런 말도 할 줄 알구나. 성종은 우현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문득, 한끼도 먹지 못해 수척해진 우현을 보며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성종은 우현에게 근처 식당에서 뭐라도 먹고 오자 말을 꺼냈고, 우현은 그런 성종에게 돈이 남아 도냐며 제 집으로 가서 대충 먹자고 말해왔다. 곰곰히 생각하던 성종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우현을 따라 근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를 타고 삼십여분을 지나자 우현의 집이 위치한 동네가 보여왔다. 버스에서 내린 성종은 까마득하게 펼쳐진 계단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우현의 집이 달동네중에서도 맨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다는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 앞에서 보니 벌써부터 숨이 차오르는듯 했다. 그렇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 했고, 계단을 오른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멀쩡한 우현과는 달리 성종은 숨을 헐떡 거리며 그대로 계단에 주저 앉아 버렸다. " 더.. 더 이상은 못가겠어… 조금만 쉬었다가 가면 안 돼? " " 아직 한참이나 남았구만. " 성종이 금방이라도 죽을듯한 표정을 하면서 우현에게 애원의 눈초리를 쏘아 보냈고, 우현은 그런 성종을 보며 어이없다는듯 고개를 저었다. 이년이 이런 저질 체력으로 대체 누굴 지켜 주겠다는거야…. 우현이 꿍시렁 거리기 시작했고 성종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아무런 동요 없이 열심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런 성종의 앞으로 우현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갑작스런 우현의 행동에 성종의 눈동자가 커졌다. " 남우현, 갑자기 왜 이래? " " 업혀, 이년아. " 우현의 말에 성종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 됐어, 너도 힘들텐데 나까지 업고 이 계단을 어떻게 오르려고…. " " 나는 남아 도는게 체력밖에 없는 놈이거든? 업히라고 할때 업혀, 이년아. 또 얼마 안가서 힘들다고 질질 짜지 말고. " 음, 니가 그렇게 원한다면 업혀 줄게. 성종도 우현의 그런 호의가 차마 싫지는 않았는지 순순히 우현의 등에 업혔다. 휴, 살았다. 안그래도 죽을거 같았는데. 그리고 본인이 내켜서 업어 준다는건데 거절하는것도 예의가 아니지, 암, 그럼. 성종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합리화 시켜 나갔다. 성종이 조심스레 우현의 등에 업혔다. 이렇게 삐쩍 말랐으니 힘이 없지. 많이좀 쳐먹어, 이년아. 우현이 툴툴 거리면서 묵묵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 나 무겁지?" 괜히 찔린 성종이 넌지시 묻자 우현이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미친, 너 웬만한 계집년들보다 더 가볍거든? 지금 너 업은줄도 모르겠다." "거짓말 하지 말고…." "진짜라니까? 아, 다 왔다." 다 왔다는 말에 성종이 고개를 들었고 우현은 한숨을 크게 한번 내쉬었다. 성종은 우현의 등에서 폴짝, 하고 내려와 우현과 나란히 섰고 이내 우현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린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 앞으로 이런 곳에서 이 녀석이 혼자 지내야 하는 거야?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앉아, 밥 차릴거니까." "…남우현." "왜." 그냥 불러본 건데 우현이 왜 부르냐 대꾸하자 성종은 고개를 푹 숙이면서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우현은 그런 성종이 싱겁다 생각하면서 이내 등을 돌려 저녁을 차리기 시작했다. 한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야 교자상 위에 저녁이 차려졌다. 밥 두공기에 김치와 된장찌개. 우현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머쓱한 듯이 말했다. "너네 집에서는 이거보다 더 많이 먹지? 난 이것도 많이 차려먹는 거야. 찌개 못해먹는 경우도 허다해." "…아냐, 이걸로도 충분해. 잘 먹을게." "맛없다고 하면 죽을 줄 알아." 반협박조로 말하는 모습에 성종이 까르르 웃었다. 그래, 맛없다고 안할게. 그러나 맛없다고 할 이유가 없었다. 우현이 차린 밥상은 충분히 맛있었다. 성종은 순식간에 한 그릇을 뚝딱 비워냈다. 우현은 입을 쩍 벌리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빼짝 마른 게 엄청 잘 먹네, 그동안 못 먹었던 건 그냥 척한 거였냐? 내숭?" "죽을래?" 성종이 주먹을 들어보이면서 화내자 우현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성종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이렇게 웃으면서 밥을 먹어본 게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설거지까지 마친 뒤 우현과 성종은 집을 나서 계단을 내려갔다. 두 손은 꼭 잡은 채로 먼저 놓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조용히 손만 잡은 채로 내려가던 중, 성종이 먼저 말을 꺼냈다. "…우현아." 성 빼고 부르는 건 처음 들어본다. 우현이 조금 놀란 눈으로 멈춰서면서 성종을 바라봤다. 성종은 무언가를 조금 고민하는 듯 하다가 이내 조심스레 입을 떼어 얘기를 꺼냈다. "…나도, 니가 좋아." "……." "우현아, 남우현. 나도 너를… 엄마야!!"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우현이 저를 격하게 끌어안아오자 성종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고, 우현은 환한 미소를 머금으면서 성종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좋아한단다. 성종이, 이 작은 녀석이 이제 나랑 같은 마음이란다. 심장이 마구 뛴다. 멍하니 있던 성종은 조심스레 손을 들어 우현의 등을 쓸어내렸고, 이내 조금 떨어진 우현이 성종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얼굴이 점차 가까워져갔다. 성종은 숨을 들이마시면서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서로의 따뜻한 온기가 부드럽게 겹쳐졌다. * * * 성규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뻔뻔한 얼굴로 제 앞에 앉아있는 두준을 보며 속에서 열이 끓어 오르는듯 했다. 두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와 번화가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자고 해왔을때, 성규는 싫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제가 올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고 있겠다는 두준의 말에, 성규는 명수에게 친구를 만난다고 거짓말을 하고 집을 나서 이렇게 두준을 만나러 왔다. 그런데 막상 두준의 얼굴을 보니 막심한 후회가 밀려오는 성규였다. 저를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추락시킨 두준이 아니던가, 그런데 두준에 얼굴에는 저에 대한 미안한 기색이라곤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두준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좋아보인다? 라는 말이었다. 좋아 보인다니, 어떻게 두준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수 있단 말인가, 어디가 좋아 보인다는건지. 제 꼴을 보고도 저런 말을 내뱉는 두준을 보며 성규는 한참동안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침묵이 흐른 뒤, 성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뭐 때문에 날 만나자고 한거야? 네 얼굴 꼴도 보기 싫으니까 용건만 말하고 빨리 끝내. " 성규가 툭 하고 말을 내뱉었다. 이 자리가 불쾌한지 성규의 얼굴은 노골적으로 구겨져 있었다. 두준은 그런 성규를 보며 묘한 표정을 해보였다. " 우리 다시 시작하자, 김성규. " 하, 두준의 말에 성규의 입에서 김빠진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거야? 다시, 다시 시작하자고? 어떻게 네놈이 그런 말을 내게 할 수가 있는 거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내가 흔쾌히 오냐, 그러자 할 것 같아?" "……." "너 때문에 교사로서의 내 인생이 완전 박살나버렸는데 내가 어떻게 너랑 다시 시작해!! 지금 나랑 장난쳐?!" "……." "…괜히 나왔네, 그딴 헛소리 지껄일 줄 알았으면 그냥 나오지 말걸 그랬다." 그 말을 끝으로 성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안 그래도 요새 명수가 알바자리 구한다고 고군분투하는데 자긴 이렇게 원수같은 놈이랑 마주앉아있다는 사실이 미안하고 또 화가 났다. 시간만 버렸다. 그대로 뒤돌아서 가려는데 두준이 일어서서 바로 성규를 붙잡았다. "이거 놔." "못 놓겠다면?" "너 진짜 뻔뻔하다, 니가 이런 놈인줄 알았더라면 진작에 상종조차 하지 않는 거였는데." "성규야." "그렇게 부르지마, 존나 토나올 것 같으니까." 진짜로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다. 성규가 독하게 쏘아붙이자 두준은 슬픈 눈을 하면서 웃었다. 진짜 나를 죽도록 미워하는 모양이네, 김성규. 하긴, 내가 자초한 일이긴 하지만… 그때, 성규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고 성규는 안에 있는 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명수였다. "어, 명수야." - 나 알바 구했어요! "아, 그래?" - 다음주부터 일하기로 했어요, 좀 작은 규모의 카페인데 번화가에 있어서 장사가 제법 잘된대요. "그래?" - 나 지금 집에 가는 길인데, 아직도 친구 만나고 있어요? "어? 아아, 금방 갈 거야. 집에서 보자." 뚝, 하고 전화를 끊자 두준이 실없이 웃었다. 하, 결국에는 그 좆고딩이랑…. "그 김명수라는 놈이랑 같이 사는 거야?" "…네가 알 바 아니잖아." "좋아?" "어, 존나 좋아. 됐냐? 그러니까 이 손 좀 놓으시지? 우리 명수 기다리거든." 이내 성규가 거칠게 두준의 손을 떨쳐내면서 그대로 카페를 나가버렸고, 두준은 이를 악물면서 쓰게 웃었다. 김명수, 결국엔 네놈이 나에게서 김성규를 빼앗아갈 줄 알았다니까? 그 싹을 진작에 잘라버렸어야 하는 건데, 김성규가 알아서 잘 하겠지 하고 방심한 내가 잘못이다. 김성규는 이제 나를 증오한다. 이건 다, 김명수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한 두준은 이내 카페 문을 열고 나갔다. 반드시, 되찾을 거다. * * * 보인다, 저 앞에 축 처진 몸을 이끄는 마음 여린 나의 연인 장동우가. 호원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항상 밝아보였던 그의 뒷 모습은 슬픔에 가득 찬 것만 같아 가슴 한 켠이 찡했다. 성열이의 속마음을 알아챈 동우가 얼마나 힘들어 했을까. 답답함에 호원이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동우형!" "호..호원아?" 급하게 뛰어와서 숨이 찬 호원이 깊은 숨을 쉬고 뱉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붓고 얼굴이 붉은 동우를 보자 또 다시 차오르는 서러움에 호원은 말을 잇지 못 했다. 그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동우를 꽉 껴안았다. 그것 뿐이 할 수 없었다. "호원아.. 놀랬잖아." "형" "..." "동우형" "..." "장동우." "응, 호원아" "좋아해." "...어?" "이호원이 너무나도 장동우를 좋아해. 그리고 사랑해." 호원의 낮은 목소리가 동우의 귀를 간지럽혔다. 사랑해, 이 한 마디가 이렇게 설레이는 말이였나. 동우는 쿵쾅쿵쾅 뛰는 저의 심장소리가 너무나 커서 호원이 알아채지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호원이를 거부해야한다. 이 생각뿐이였다. 그러지 않다면 저보다 더 오래 호원이를 바라봤을 성열이가 안타깝고 불쌍했다. 이 곳은 나의 자리가 아니다. 여기까지 생각을 하자 다시 눈물이 핑그르 돌았다. 목이 메여옴에도 불구하고 동우는 꾸역꾸역 차오르는 슬픔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호원아... 난.. 난 있잖아." "좋아했고, 좋아하고, 좋아할꺼야." "호원아.. 나는.." "성열이한테 들었어." 이 한 마디에 동우의 눈이 커졌다. 성열이한테 들었다니, 무슨 말이야? 다그치듯 물어오는 동우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당황했는지 흔들리는 눈동자에 꾹 다문 입술까지. 비에 홀딱 젖은 강아지같은 모습에 호원의 얼굴엔 미소가 그러졌다. 제 눈앞에 위치한 동우의 단정한 입에 입을 맞추었다." "ㅎ,호원아!.." "그러니까 혼자 아파하고 자책하지 말아요. 그 미안함, 내가 대신 느낄게. 그러니까 장동우는 이호원 좋아해줘요." "...." "그 것 하나면 돼." 아아..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이 기분은 호원이도 알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일까 아니면 나도 사랑할 수 있다는 이기적인 내 마음일까. 차오르는 눈물에 동우는 훌쩍였다. 어쩌면 눈물도 이렇게 많은 지. 이를 지켜보던 호원이 다시 한 번 울고 있는 동우를 제 품에 안았다. 도망가지 못 하도록 꽈악. 그리고 마주한 심장의 떨림이 서로에게 느껴지도록. * * * 해가 저물어가는 하늘과는 다르게 성열은 그 자세 그대로 옥상벽에 기대어 운동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우 형이랑 호원이, 잘됐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저절로 다시금 목이 메여왔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저는 여전히 호원을 좋아하고있었다. 잊겠다 다짐했지만 그것이 어찌 수년간의 짝사랑을 한순간에 지워버릴수있을까.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한다 속삭이는것을 바로 앞에서 보는데 안 아플 사람이 또 어디있을까. 성열은 그러면서 뭐가 좋은지 웃고있었다. 사실, 저는 이렇게 아프지만 마음속 깊은곳에선 저 둘이 행복하길 빌고있었다. 그래서 호원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정리하려 했던 것이고, 또 앞으로도 그 둘의 행복을 빌어줄것이다. 이내 성열의 눈에서 그렁대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려내려 뚝뚝 떨어졌다. 아프다. 정말 아프다. 진짜로 무지무지 행복한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가슴 한 구석이 너무 저릿하게 아파왔다. 결국 간신히 벽에 기대어있던 성열이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게 주저앉아 오랫동안 가슴을 움켜쥐며 엉엉 울기만 했다. 저물어가는 해를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미 너의 모습은 내 눈앞에서 사라지고 없지만 아직 남아있는 너의 향기는 네가 여전히 웃으며 내 앞에 서있는 착각이 일게 만들었다. 자꾸만 보이는 환상에 성열은 부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이제는 정말로 너를 잊어야할 때가 온것이다. "이호원" 수년간 네 생각에 하루하루를 웃게 만들어주었던 사람아. "호원아" 그만큼 나를 한없이 울게 만드는 세상에서 제일로 못된 사람아. "정말로 좋아해" 이 고백을 마지막으로 너를 영영 내 마음속에서 지워야지, 이제는 사랑이 아닌 친구로 그렇게 널 내 마음에 담아야지. "사랑해" 이내 옥상의 마지막 노을 빛이 바람과 함께 흩어졌다. * * * "김성규 씨~" "……." "성규 형!" "…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느라 내가 부르는 것도 못 들어요?" 두준을 만나고 난 뒤 성규는 머릿속이 매우 복잡했다. 저를 이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뜨려놓은 주제에 왜 다시 시작하자는 말을 제게 건넸는지, 그리고 그 말을 꺼낸 저의가 무엇인지 도저히 짐작이 가지를 않았다. 그 때문에 성규는 소파에 앉은 채로 한참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 때문에 명수가 저를 부르는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 성규는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대충 둘러댔지만 명수는 성규의 표정에서 심상찮음을 느꼈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는데 저에게 숨기려는 것이다. 이내 명수가 성규의 옆에 앉아 성규를 빤히 바라보면서 물어봤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하루종일 뭘 그렇게 생각해요?" "……." "또, 또 시작이네. 그렇게 애틋한 눈빛으로 나 바라보는 거." 교사 자격을 박탈당한 뒤 성규는 살던 오피스텔을 처분하고 조금 낡은 연립주택으로 이사갔다. 교사직에서 짤려 오피스텔을 관리할 수 있을 정도로 벌 수 없게 된건 둘째치고 그 오피스텔은 다름아닌 두준이 마련해 준 것이었다. 그랬기에 미련없이 처분할 수가 있었다. 명수는 그런 저를 군말없이 따라와 주었다. 오피스텔에 비해 한없이 좁고 쾌적하지 못한 환경이었지만 명수는 단둘이 딱 붙어 살기 좋다면서 능청스레 굴었다. 명수의 말대로, 그는 파양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명수는 울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평생 성규의 옆에 붙어있을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고졸 학력은 검정고시로 취득하겠다고 했다. 머리가 좋으니 명수는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이 되지 않았다. 다만, 아직까지 명수는 미성년자의 신분이었다. 현실적으로 따지자면 성규가 명수를 먹여살려야 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근처에 피아노 가르치는 학원이라도 있는지 알아봐야 하나? "무슨 일 있었냐니까요?" "…명수야." "네, 말해요." "오늘, 윤두준을 만났어." 이제 나와 이 녀석 사이에 무얼 더 숨기겠는가. 서로 의지해도 모자랄 판에 괜히 비밀같은 걸 만들었다가 사이에 금이 가는 건 싫었다. 차라리 솔직하게 터놓는게 낫겠다 싶어서 성규는 솔직하게 이실직고를 했다. 윤두준이라는 이름이 성규의 입에서 언급되자 명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진다. 성규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나한테 그러더라, 다시 시작하자고." "……." "진짜, 오만 정 다 떨어지더라.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괜찮아요?" "어, 좀전까지는 되게 언짢았었는데 명수랑 있으니까 괜찮아졌네." 두준 앞에서는 센 척을 하면서 나왔지만 사실은 조금 두려웠다. 두준의 눈빛은 집요해 보였다. 절대, 절대 저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사실만은 끝내 명수에게 말하지 않은 채, 성규는 명수에게 기대었다. * * * 발인이 무사히 마쳤다. 성종은 제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하루 온 종일 우현의 옆에 붙어 있었다, 두 번 다시 성종의 앞에서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우현은 제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마저 세상에 없다는 현실이 피부로 생생히 느껴져 오니 서러움에 복받치는 가슴을 진정 시킬 수가 없었다. 우현은 이를 악 문채 눈물 한 방울을 떨구었다. 이제 누굴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걸까, 우현은 앞으로 이 험한 세상속을 저 혼자서 살아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러던중 문득, 고개를 돌려 제 옆에 서 있는 성종을 바라 보았다. 성종은 바라보는 순간, 떨리던 우현의 눈동자가 멈춰섰다. 그래, 내겐 아직 의지할 사람이 남아 있다. 진심으로 나를 위해주는 녀석. 나는 너를 바라보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날 버리지마. 아니, 내가 널 놓아주지 않을거야. 우현은 속으로 그리 다짐하며 마음을 굳건히 했다. " 이제 들어가봐야 하지 않냐? " 성종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우현이 옅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우현에게 성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조금 더 같이 있어 주겠다. 라고 답했다. 성종의 말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거니와 내심 성종과 같이 있고 싶었던 우현은 져주는척 하면서 성종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어쩌다보니 또 다시 성종과 함께 제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우현은 성종을 등에 업고 계단을 올랐다. 두번이나 피해를 끼칠수 없던 성종이 손을 흔들며 괜찮다고 말해왔지만 우현은 반 강제적으로 성종을 제 등에 업었다. 높게 펼쳐진 계단을 오르던 중, 우현은 고개를 살짝 돌려 뒤를 바라 보았다. 많이 피곤했는지 어느샌가 잠에 푹 빠진 성종을 보며 우현이 실풋 웃어 보였다. 우현은 혹여나 성종이 꺨까봐 조심스레 계단을 올랐다. 뒤이어 집 앞까지 도착한 우현은 숨을 골랐고, 우현의 앞으로 웬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름아닌 집 주인이었다. " 학생, 월세가 석달치나 밀렸어. 봐주는것도 한계가 있지! 방을 빼던가!! " 갑작스레 등장한 여자가 다짜고짜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기 시작했고, 찢어질듯한 하이톤에 잠이 들었던 성종도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들었다. "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 " 학생, 그 말만 몇번째인지 알아? 더 이상은 못봐주니까 당장 방 빼. " 여자는 우현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지금 제 처지 아시잖아요. 우현은 굴하지 않고 또 한번 여자를 설득 해보려 했지만, 돌아 오는 대답은 네 아버지가 돌아갔다는 소식은 들었다만, 이거하곤 상관 없는 일이잖아? 라는 차가운 대답 뿐이었다. 인정머리없는 집 주인을 보며 우현은 주먹을 아득 쥐었다. " 씨발, 내가 더러워서 방 뺀다. " 분을 참지 못한 우현이 결국엔 욕설을 내뱉었고, 그에 놀란 성종은 재빨리 우현의 등에서 내려와 우현을 말리기 시작했다. " 말투좀 보게!! 하긴, 그 애비에 그 자식이라더니! 허구한날 술만 퍼마시던 작자한테 자식놈이 뭘 보고 배웠겠어! " 흥분한 여자가 혀를 끌끌 차며 갈갈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성종이 우현의 앞에 나서면서 여자를 노려봤다. 왠지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우현이 정말로 폭력을 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더 이상 우현을 이 여자와 상대를 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성종은 미친 짓을 감행했다. "그만하세요 이제!! 방 뺀다잖아요!! 아주머니도 진짜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학생한테 그래요? 사정 어려운 거 뻔히 아시면서 며칠만 좀 더 봐주실 수도 있는 거잖아요!! 얘 오늘 아버지 보내고 온 얘에요!! 지금 얼마나 슬프겠어요? 아주머니는 그런 경험 없으세요?! 딱 보니까 나이 꽤 많으신 것 같은데 있으실 거 아니에요!! 그럼 얘 심정 조금이라도 헤아려줄 수는 있는 거잖아요!! 이런식으로 매몰차게 몰아붙이시는 건 너무하잖아요!!!" 성종의 말에 여자는 물론이고 우현마저 놀랐다. 단 한번도 사람들 앞에 나서서 제 의견을 피력한 적이 없던 녀석이다. 교내에서 내성적인 성격하면 이성종, 할 정도로 유명한 데다가 수업시간에 발표라도 시키면 질색팔색을 하면서 몸을 꼬던 녀석이 제 앞에 서서 여자에게 쓴소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혀 믿겨지지가 않았다. 성종의 말에 여자는 콧방귀를 뀌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 아들뻘인 녀석한테 이런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영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틀린 말은 하나 없었다. 여자는 이내 대문 밖을 나서면서 말했다. "짐 정리할 시간은 줄 테니까, 내일 방 빼줬으면 좋겠어." 하, 시간을 준다는 게 고작 오늘까진가? 우현은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여자가 계단을 내려가자 성종이 뒤돌아서 우현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괜찮아?" "…너 많이 달라졌다?" "내, 내가 뭘?" "수업시간에 발표하는 것도 질색하던 년이 아까처럼 남의 앞에 나서서 당당하게 얘기할 줄도 알고… 너 진짜 내숭기 있는 거 아냐?" "농담할 기분이긴 해? 일단 들어가자." 이내 성종이 우현의 손목을 잡아끌면서 대문을 넘었고 우현은 그저 성종이 이끄는대로 움직였다. 짐이라고 해봤자 챙길 것도 별로 없었다. 교복과 낡은 사복 몇개, 그리고 소소한 개인 물품 몇가지를 제외한다면 우현이 이 집에서 챙겨갈 건 그리 많지 않았다. 우현은 씁쓸하게 웃다가 이내 몸을 떨고 있는 성종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까 전 여자 앞에 나서서 얘기를 한 것이 진짜 미친 짓이기는 했나보다. 우현은 불안증세를 보이며 심하게 떨고 있는 성종의 손을 꼭 잡아왔다. 그러자 성종이 놀란 눈으로 우현을 바라봤다. "그러게 누가 안하던 짓 하랬냐? 하여튼 사서 고생질이야." "…너 걱정되서 그랬지." "미안해." 우현이 고개를 푹 숙이면서 사과했고 성종은 그런 우현을 빤히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왠지, 오늘은 이대로 혼자 둔 채로 집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내 성종이 말했다.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갈래. 그래도 되지?" * * * 갖고 싶은것은 모두 다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두준은 모자랄것 없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금지옥엽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어린 시절을 보내왔다. 이런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지금껏 제가 갖지 못한건 없었고 제가 가진걸 남에게 뻇긴적도 없었다. 그런데 제가 먼저 손에 넣고 품었던 김성규를 남에게 뺐겼다. 처음이었다. 제 것을 남에게 빼앗긴것은. 그것도 저보다 한참 어린 좆고딩한테 말이다. 이는 두준의 자존심에 크나큰 스크래치를 입히는 일이였다. 홧김에 못이겨 성규의 나체사진을 퍼트리게 되었고, 이 일을 후회 하기도 전에 성규와의 관계는 이미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치닫고야 말았다. 나날이 흐를수록 성규의 대한 마음은 단순한 아쉬움에서 광기 어린 집착에까지 이르렀다. 허나, 성규를 제게서 빼앗아간 김명수가 없어진다면 성규가 다시 제게 돌아올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준은 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전에 성규의 핸드폰 통화 기록에서 보았던 명수의 전화번호.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저장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준은 망설임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화음이 몇번 들림과 동시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오랜만이네. " ["누구.. 윤두준?! 당신이 무슨 일로 나한테 전화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명수의 목소리에 두준의 눈빛에 살기가 가득 담겼다. 제것이였던 김성규를 빼앗아간 놈. 당장이라도 달려가 멱살을 붙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허나, 두준은 십호흠을 하며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 김성규는 잘 있어? " [ " 뭐라고? 잘 있냐고?! 그게 당신 입에서 나올 소리야?! " ] 두준의 입에서 성규의 이름이 거론되자 명수가 버럭 악을 지르기 시작했다. 뻔뻔한 새끼, 쓰레기 같은 놈. 명수는 상대방이 저 보다 나이가 많다는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두준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다시는 김성규 앞에 나타나지마. 마지막 경고야.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협박을 하는 명수를 보며 두준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 우리 지금 만나는게 어때? " [ "뭐라고?! 내가 당신과 왜 만나야 하지?" ] " 남자대 남자로써 결판을 짓는게 어때? " [ " 결판? " ] 두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성규를 그렇게 만든 나한테 복수 하고 싶지 않아? 두준의 입에서 나온 말에 수화기 너머로 침묵이 일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로 가면 되지? 라는 명수의 대답이 들려왔다. 역시나 넘어 왔다. " 내 오피스텔로 와. 주소는 문자로 보낼게. 그리고 성규한테는 말 안했으면 좋겠어. 괜히 걱정할테니까. " [ " 그게 당신 입에서 나올 말이야? 그렇게 김성규를 걱정한다는 놈…. " ] 뚝, 명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준은 전화를 끊었다. 뒤이어 제 오피스텔의 주소를 문자로 보냈다, 두준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 * * "뭐, 뭐?" "여기서 자고가겠다고, 어디서 자면 돼?" "안돼, 절대 안돼" 우현은 성종의 말에 기가 막혀 겨우 말을 이었다. 지금 얘가 뭐라하는거야, 당황하는 우현과는 다르게 성종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럼 안되지, 안되고말고 계속 그 말만을 중얼거리는 우현을 한참동안 무표정으로 보던 성종의 입이 가느랗게 호선을 그리더니 이내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그것이 웃음을 참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챈 우현의 얼굴이 마치 토마토마냥 새빨개졌다. "아 엄청 웃겨, 남우현" "너 지금 나보고 웃기다 그랬냐?" "웃기지 그럼 슬퍼? 내가 이 시간에 집까지 위험하게 가야겠어?왜 이렇게 과민반응이야?" 설마 이상한 생각 한건 아니지? 뒤이어 나온 성종의 말에 우현은 귀까지 새빨개져 제대로 말을 잊지 못했다. 성종은 그런 우현을 뒤로한체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있는 이불을 제대로 정돈했다. 제 딴에는 우현이 걱정되서 자고가겠다는 말이었는데 이렇게 오버하는 우현을 보니 조금은 놀려주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지금까지 당한거 복수해주겠다는 생각도 좀 들고. "왜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 일로 와서 자." 우현은 멍하니 이불속에 파고든 성종을 바라보며 짧은시간동안 아주 심각한 고민을 하였다. 지금 성종의 옆에서 정말 시체처럼 잠만 자느냐, 아니면 아니면…. 또 다시 생각하니 우현은 간신히 가라앉은 얼굴이 금새 빨개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남우현, 넌 몇시간 동안 마네킹이 되는거야. 마네킹이 어떻게 그, 그런 생각을 하겠어. 그렇지? 우현은 미세하게 비치는 불을 끄고 성종과 조금 떨어져있는 이불에 파고들며 성종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 체 눈을 감았다. 물론 쉽게 잠에 들수 있을린 없었지만서도 그렇게라도 하지않으면 정말 무슨 일이라도 날것같았기 때문이다. 이 년은 진짜 왜 우리 집에서 자겠다고 난리를 쳐서는 이 고생을 하게 만들어. "우현아." "……" "남우현, 자?"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을 뭐라 놀릴지도 모르고 오늘 하루동안의 피곤함이 한꺼번에 밀려와 서서히 자신도 모르게 잠에 취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종은 그것에 굴하지 않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있잖아, 나 오늘 진짜로 깨달은게 하나있는데" "……" "넌 나 없으면 안될것같아. 그치? 넌 나없으면 안되지?" "……" "앞으론 내가 너 감싸줄게, 지금까지 힘들었던거 다 잊어버려. 앞으론 내가 너 웃게해줄거야" "……" "그만큼 나도…너 많이 좋아하니까…." 우현은 성종의 고백에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점점 잠에 빠져버렸다. 여전히 대답이 없는 우현의 뒷통수를 보며 성종은 눈을 깜박였다. 진짜 자나보네, 뭐야 기껏 이렇게 고백해줬더니만. 성종은 이불자락을 꽉 쥐었다. 차갑고 딱딱하고 좁고 제 방과는 확실히 딴판인 우현의 집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그 어느 곳과 비교할수 없이 따듯하고 아늑했다. 따듯해, 성종은 조용히 눈꺼풀을 닫았다. 그리고선 조심스레 우현의 등에 제 몸을 기대었다. 따뜻하다. 단단하다. 그렇게 성종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두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만나자는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명수 역시 한번쯤을 두준을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때마침 성규는 근처에 있는 피아노학원에 면접을 보러 간다고 하면서 집에 없었던 차였다. 금방 갔다오면 되겠거니 하는 생각에 명수는 옷을 대충 챙겨입고 밖으로 나섰다. 윤두준울 만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장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명수였다. 이번에는 내가 저녁을 차려줘야지. 버스를 타고 두준이 말한 오피스텔에 도착한 명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두준이 말한 호수가 적혀 있는 문 앞에 선 명수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초인종을 꾹 눌렀고, 머지않아 문이 열렸다. 보기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인상이다. 명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명수가 눈에 띄게 인상을 구긴 반면 두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게 더 짜증났다. "오랜만이네?" "웃지마, 안 그래도 없는 정 더 떨어질 것 같으니까." "안으로 들어와." "싫은데?" 역시, 학교 앞에서 맞닥뜨렸을 때부터 만만찮은 놈인 걸 알았지만 저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고 한다. 두준은 쓰게 웃으면서 현관문을 더 활짝 열었고, 계속해서 두준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명수는 마지못해 혀를 차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전체적으로 깔끔한 인테리어에 명수는 다시 한번 혀를 찼다. 깔끔한 척 하기는, 존나 추잡한 짓도 서슴치 않는 주제에…… 부엌으로 들어간 두준이 음료수가 담긴 컵을 들고 나왔다. "오느라 수고했을텐데, 이거라도 좀 마시지?" 그에 명수는 아무런 의심없이 컵을 받아들어 음료수를 한잔 쭉 들이켰다. 그리고는 소파에 앉아 두준을 올려다 보면서 얘기했다. "결판을 내자는 게 어떤 식으로 내자는 거야? 맞짱? 아니면, 뭐 다른 수라도 있나." "어려서 그런가, 성질이 좀 급하네." "댁이 나한테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존나 성숙한 어른인 척 하지마, 김성규 나락으로 떨어뜨린 거 생각만 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아도 시원치 않으니까." 으르렁 거리면서 하는 말에 두준이 피식 웃었다. 그에 명수가 화를 참지 못하고 소파에서 일어나려다 순간 머리가 띵, 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뭐지? 갑자기 현기증이…… 시야가 흐려진다. 눈 앞에서 여러 색깔이 왔다갔다하고 막 섞여든다. 두준이 여러 명으로 겹쳐 보였다가 다시 흩어진다. 씨발, 뭐야!! 설마, 아까 마신 음료수에……. "씨발, 이 개…!!" 두준에게 한발짝 다가서려던 명수가 결국 약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맥없이 쓰러져 버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명수가 무너지자 두준은 큭큭거리면서 웃었다. 두준은 폰을 꺼내들었다.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지. 그런데 그때……. "씨발, 문 열어!!!" …김성규의 목소리다. * * * 성열은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돌아 오시지 않은 부모님과 아무런 불빛조차 켜져있지 않은 집안. 성종인 오지 않은 건가 싶어 살짝 열어본 방안에도 아무도 없었다. 그제서야 피부로 느껴졌다. 왜임지 혼자가 되어버린 것 같은 생각에 그대로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사랑하는 사람이 친구라는 잔인한 현실과 나를 사랑해주던 동생마저 제 사랑을 찾아 가 버린 이 외로움속에서 성열은 몸부림을 쳤다. "흐으. 이제는 혼자야." 울어도 따스히 저를 보등어주는 작은 몸이 없었다. 성종은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기 전에 좋은 동생임은 틀림이 없었다. 늘 제 곁에 머무르며 아픈 가슴을 쓰다듬어주는 존재였는데 그제야 그동안 제가 성종에게 모질게 대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까지 밀어 낼 필요는 없지 않았나 후회도 들었다. 그렇게 고독을 씹고 있을 때 부모님께 연락이 왔다. 성종에게서 연락이 왔다고 했다. 오늘은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고. 그 말에 성열은 그 친구가 우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정말, 정말로 그 녀석한테 마음을 준 거구나. 성열은 쓰게 웃었다. 이 마음을 대체 어떻게 끝낼까, 겉으로는 두 사람을 응원하고 격려했지만 아픈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건 별개의 문제였다. 오늘은 왠지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성열은 침대 위에서 한참이나 몸을 뒤척였다. * * * 면접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 성규는 간만에 들뜬 기분으로 집에 가는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오는 길에 장도 봐왔다. 오늘은 명수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상을 차려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때, 명수가 빌라건물 밖을 나서는 것이 눈에 보였다. 아는 척을 하려는데 명수가 거의 쏜살같이 가는 바람에 성규는 말도 못 건네보고 그대로 급하게 명수를 뒤쫓았다. 명수를 따라가던 성규는 이내 낯익은 장소에 표정을 굳혔다. 두준이 사는 오피스텔 건물이었다. 뭐지? 명수가 대체 왜?! 성규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이내 명수가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성규는 조심스레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두준이 사는 층으로 간 성규는 이내 대면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게 되었다. 보아하니 두준이 명수를 부른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연락을 한거지? 혹시 예전에 내 폰을 보거나 해서 명수 연락처를 알고 연락을 한 건가? 명수가 똥 씹은 표정을 하면서 안으로 들어가자 성규는 문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했다. 대체 윤두준이 무슨 속셈으로 명수를 부른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절대 좋은 의도를 가지고 부른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생각에까지 미치자 성규는 앞뒤 잴 것도 없이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머지않아 문이 열렸다. 두준이 조금 당황한 듯한 얼굴로 성규를 맞았다. "어쩐 일이야?" "명수 왜 불렀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난 잘 모르겠다. 그 자식을 왜 여기서 찾아?" "명수 들어가는 거 봤으니까 시치미 뗄 생각하지마." 성규의 말에 두준의 표정이 단박에 굳었다. 두준 너머로 애타게 명수를 찾던 성규는 이내 바닥에 맥없이 쓰러져 있는 명수를 발견했고, 장바구니를 내려놓고 두준을 밀치면서 바로 명수에게 달려갔다. 반쯤 안아들자 명수의 몸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명수야, 명수야!!!" 그래도 숨은 붙어있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성규는 이내 두준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명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 "진짜 갈 데까지 갔구나, 윤두준. 니가 이런다고 내가 너한테 다시 돌아올 것 같아? 웃기지마, 난 절대… 너한테 안 돌아가.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나를 놔줘." 그 말을 끝으로 성규는 명수를 등에 업어 장바구니까지 든 채로 두준의 방을 빠져나갔다. 다신, 다신 여기에 올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 * * 정신이 들자마자 토끼가 밀려온 명수가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명수를 보며 성규는 안절부절 못한채 명수의 등을 쓰다듬어 내려갔다. 속이 뒤집어진것만 같은 기분에 명수는 죽을맛이었다. 위액까지 쏟아내며 구역질을 하다보니 온 몸에 힘이 다 빠져나가 버린듯 했다. " 윤두준 그 새끼 대체 뭘 먹인거야!! " 발을 동동 거리던 성규가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고함을 내질렀다. 당장이라도 윤두준을 찾아가 똑같이 응징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이런 명수를 두고 갈 수가 없어 그 마음은 고이 접어 두었다. 변기를 붙들고 오바이트를 해대던 명수가 토끼가 좀 가라 앉았는지 화장실 벽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규가 명수를 부축하며 화장실을 나섰다. 이제 좀 살것 같다. 명수는 좀전보다는 나아진 기분을 느끼며 저를 부축하는 성규에게 몸을 맡긴채 숨을 골랐다. 머리가 푹푹 쑤셔 오긴 했지만 버틸만은 했다. 문득 좀전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윤두준이 내민 주스를 먹고 정신을 놓고 쓰러졌던거 같다. 수면제를 탔겠거니 생각했는데 몸이 이렇게 아픈걸 보니 단순한 수면제는 아닌듯 싶다. 뭐가 어찌 됬던간에 눈을 떠보니 성규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저를 쳐다 보고 있었다는게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내가 걱정되어 급히 달려 왔을 김성규의 모습이 떠올라서 말이다. 명수는 성규의 부축을 받으며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 괜찮아? 성규가 걱정 어린 눈빛을 한 채 명수에게 물었고 명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두어번 끄덕여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성규가 방을 나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운 물이 담긴 넓은 대야를 들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수건을 물에 차갑게 적신 뒤 명수의 이마에 살포시 올렸다. " 정말 괜찮은거 맞지..? 병원 안가봐도 돼? " " 응, 괜찮아…. 이렇게 지극 정성으로 간호해주니까 금방 나을거 같아. " 성규의 물음에 명수가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결 나아진것 같은 명수를 보며 성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성규는 제 가슴을 쓸어 내리며 명수의 손을 꼬옥 잡았다. 앞으로 그 자식이 전화해도 받지마 알았어? 성규가 명수의 뺨을 쓰다듬어 내리며 속삭였고, 명수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말 네가 잘못 되는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 말을 하는 성규의 목소리가 축축히 젖어 있었다. 성규가 많이 놀랐을걸 생각하니 명수는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명수는 맞잡은 손에 더욱 더 힘을 실으며 눈을 살짝 감았다 떴다. 나를 이렇게 걱정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는데 더 이상 바랄건 없다. 명수가 환하게 웃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은 자세를 했다. 아직 누워 있어야 돼. 뭐하는거야! 화들짝 놀란 성규가 명수를 보며 쏘아 붙였고 명수는 제 품으로 성규를 덥썩 끌어 안으며 속삭였다. 형 안을 힘은 남아 있어요. 라고. * * * "어디 갈데는 있어?" 다음 날 아침, 우현과 성종은 일어나자마자 거의 쫓겨나다시피 집을 나서야 했다. 스스로 깰 때까지 일부러 안 깨운 걸 감사하게 여기라는 집주인 여자의 말에 성종은 기가 찼다. 결국 그렇게 씁쓸한 감정을 안고 달동네를 벗어나던 두 사람은 동시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 성종은 우현의 거취가 무척이나 걱정되었다. 친인척도 없다 그랬던 것 같은데… 마음 같아선 자기 집에 오라 하고 싶었지만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에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애초에 책임지지도 못할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았다. 성종의 물음에 우현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뭐, 서울역도 나름 살만하다던데." "너는 농담이 잘도 나온다?" "정 안되면 어디 센터라도 알아보던가 해야지." "그러지 말고 성규 쌤한테 연락해보는 건 어때? 성규 쌤이 너 좀 챙겨줬다면서." 성종의 말에 우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이상 신세지는 것은 싫다. 저를 챙겨준 것만으로도 큰 은혜를 입은 거라고 생각했다. 우현의 거부반응에 성종은 더 깊게 한숨을 내쉬었고 그에 우현이 괜히 걱정어린 타박을 했다. "한숨 좀 쉬지마, 너 때문에 기분 더 처질라 그런다." "걱정되서 그러지…." "어허, 이 년이 서방님을 뭘로 보고! 나 어디 내놔도 끄떡없는 몸이거든?" "서방님 좋아하네…." 분명히 속으로는 많이 힘들텐데도 이렇게 저를 달래주려고 하는 걸 보면 왠지 모르게 짠한 기분이 들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종의 집 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도착을 했고, 성종이 선뜻 올라서지 못하자 우현이 떠밀다시피 하면서 성종을 버스에 태웠다. 빈 자리에 앉은 성종이 창문을 열고 우현에게 말했다. "이따가 전화해!" "알았어." 버스가 점점 속력을 낼 수록 우현이 점점 시야에서 작아져 이내 점이 되었다. 성종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고개를 숙였고, 이내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내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집문을 열고 들어가니 성열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부모님은 일하러 나가셨고, 형은 집에 있나? 성종은 슬며시 성열의 방문을 열었다. "…형, 자?" 침대에 쥐죽은 듯이 누워있는 성열의 모습에 성종은 조심스레 성열에게 말을 건넸다. 진짜 자는 건가? 아무 대답이 없는 성열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하던 성종은 이내 끙끙 앓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바로 방문을 활짝 열고 들어간 성종은 등을 지고 누워있는 성열의 몸을 돌려 이마를 짚어봤다. 뜨겁다. 게다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혀, 형…!!" "하, 하아…." "어, 어, 어떡해…." 발을 동동 굴리면서 안절부절하던 성종은 이내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뒤 서둘러 방을 나섰다. 냉장고 문을 열어 얼음을 꺼내 비닐에 넣어 봉하고 나서 수건을 물에 적셨다. 그리고 다시 방안으로 들어가 그것들을 성열의 이마 위에 올렸다. * * * 성열은 항상 강했다. 어렸을 때부터 성열은 항상 어른스러웠고 겁이 많아 항상 맞고오는 자신과는 달리 성종을 괴롭힌 아이를 찾으러 가겠다며 놀이터로 무작정 뛰어가 그 아이들을 혼내준것도 바로 성열이었다. 그런 우리 형제를 보며 어른들은 피가 섞였는데도 왜 이렇게 다르냐며 혀를 끌끌 찰 정도로, 우린 달랐다. 생김새도 그리고 성격도. 그렇게나 닮은 구석이 없었던 성열과 자신이었는데도 다른 형제와 다르게 서로를 챙기며 살아왔다. 누가 형 동생 할것 없이 서로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며, 그렇게. 근데 그런 저와 성열의 관계가 오직 자신의 고백으로 무너져버린것이다. 성열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동생이 자신을 좋아한다며 고백을 하고 정작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이미 다른사람을 마음에 담아두었으니. 어쩌면 성열이 이렇게 앓아 눕게된건 순전히 자신의 탓이었는지도 몰랐다. 우리 형, 어쩌면 좋아.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있는 성열을 바라 보았더니 어찌나 성열의 열이 높았는지 벌써 비닐의 얼음이 녹아 점점 액체 상태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럴땐 어떻게 해야하는지 학교에서도 배운적없던 성종은 벌떡 일어나더니 갑자기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죽이라도 끓여볼까 하는 마음에 냄비를 꺼내긴 했지만 생전 무엇을 만들어본적도 없는지라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통 감을 잡지못한 성종이었다. 쌀, 쌀부터 넣어야 하나? 아니면 물부터 넣어야하나? 성열의 방을 뒤돌아보던 성종이 이내 무엇인가 큰 결심을 한듯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들며 익숙한 번호를 찍었다. 좀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지금 그게 문제인가, 지금은 끙끙 앓고있는 성열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 여보세요 ] "우현아,너 혹시" 죽 만드는 법 알아? 성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전화기 안에선 우현의 웃음소리가 끓이질 않았다. * * * 성종의 전화를 받고 곧바로 성종이 사는 아파트로 향했다. 여기 땅값 비싸다던데. 좋은데서 살고 있었네. 성종이 꽤 잘 사는건 알고 있었는데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우현은 문 앞에 서서 설레는 맘을 안고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집 안에서 성종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우현의 얼굴엔 금새 화색이 돌았다. 남우현이다. 우현이 실실 웃으며 제 이름을 또박또박 말했고 그와 동시에 현관문이 활짝 열렸다. 우현의 눈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성종의 모습이 들어왔고 앙증 맞은 병아리가 그려져 있는 앞치마에 자연스레 시선이 향했다. 앞치마도 꼭 지 같은것만 입고 있네. " 얼른 들어와. " 성종이 활짝 웃으며 말했고 우현은 신발을 벗고 성종을 따라 거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멀뚱멀뚱 서서 고개를 두리번 거리는 우현에게 성종이 얼음물이 담긴 컵을 건넸고, 마침 목이 말랐던 우현은 물을 벌컥 들이 마시고는 입 주변을 스윽 닦았다. " 그런데 죽 만드는법은 왜 물어본거냐? " 우현이 잔뜩 기대를 안고선 물었다. 성종이 저를 위해 죽을 만들어 주려나 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성종의 입에서 나온 말은 우현의 기대를 와장창 깨트렸다. " 형이 지금 아파, 그래서 죽을 끓이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네가 마침 요리도 잘하고 하니까.. " " 그러니까 지금 그거 때문에 날 부른거야? 이성열 새끼가 먹을 죽을 끓이라고? " 하. 나참. 우현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잔뜩 기대를 안고 왔더니 이년이 내게 죽 대신 똥을 투척 하는구나. " 사람 말좀 끝까지 들어봐! 너보고 끓이라는게 아니고, 네가 방법을 알려주면 내가 끓…. " " 이년아, 그게 그 소리잖아! " 우현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성종의 말을 잘랐고, 성종은 우현의 과한 반응이 이해가 되질 않아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우현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갸웃 거리던 성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그래서 못 도와주겠다는거야? " "…." 성종의 되물음에 우현은 잠시 고민하는듯 싶더니 입을 열었다. " 도와줄테니까 많이 끓여. 나도 니가 끓인죽 먹을거야. " " 응, 알았어! " 우현의 말에 성종이 미소를 띄우며 주방으로 향했고, 우현은 주머니에 손을 꽂고 건들거리며 성종의 뒤를 따랐다. 저를 위해 끓여주는 죽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우현은 어찌됬던간에 성종이 끓인 죽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떴다. 내가 이성열 보다 더 많이 먹어야지. 우현은 그리 마음을 먹고 성종과 함께 주방에서 죽을 만들 재료들을 꺼내었다. 성종이 죽에 넣을 채소들을 물에 깨끗이 씻고 도마위에 올려놨다. 칼을 잡은 성종이 채소들을 썰기 시작했고, 우현은 그 모습이 영 불안해 보일 수가 없었다. " 앗! " " 뭐야, 왜 그래?! " 아니나 다를까 칼질을 하던 성종이 손을 베였다. 화들짝 놀란 우현이 재빨리 성종의 옆으로 달려갔다. 이럴줄 알았어. "아아.. 괜찮아, 작게 베인 건데 뭐." "괜찮기는! 피가 나잖아! 밴드 어디있어, 약은?" "괜찮다니까? 이 정도 쯤이야…." 정말 작게 베인 것 뿐이고, 손가락이 잘릴 정도만 아니면 된 건데 제 앞에서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약과 밴드를 찾는 우현을 보며 성종은 조금 더 우현의 참 된 모습을 본 것만 같아 입가에 활짝 번진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이 정도면 휴지로 꾹꾹 누르면 금방 멎을텐데. 잘 보이지도 않고 그저 피가 동그랗게 맺힌것 가지고 뭐가 큰 일인지 저리 허둥지둥인지 모르겠다. 밴드를 찾아 나서던 우현은 성종의 베인 손에서 점점 커져가는 핏방울에 결국은 하얗고 길다란 성종의 손가락을 제 입을 넣어버렸다. 으, 비린내. 적은 양이라지만 입안에 가득 찬 피린내에 우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야야.. 됬다니까. 뭐해, 쓰라려워!" "…." "아.. 진짜 남우현 바보, 멍청이." 내가 손가락이 정말 절단 되거나 몸에 상처생기면 그 때는 장난 아니겠네.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 한 말이 성종의 입 안을 맴돌았다. 제 손가락을 물고 있어 아무런 대꾸도 못하는 우현을 바라봤다. 길게 뻗어진 동그란 눈 하며, 잘난 콧대와 오똑한 콧날, 그리고 갸름한 턱선까지. 심지어 제 손가락을 감싸는 시원시원한 입술에 성종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남우현, 정말 잘 생겼구나. "왜, 서방님이 너무 잘 생겼냐?" 넋을 놓고 제 얼굴을 요목조목 바라보는 성종의 시선을 느꼈는지, 우현이 바람 빠진 소리와 함께 성종과 눈을 맞추었다. 조용한 부엌과 따스하다 못 해 간지러운 시선까지. 꿀꺽, 긴장한 탓에 노골적으로 들리는 성종의 침 삼키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저들의 시간을 멈춘 것마냥 조용하고 고요했다. 우현의 얼굴이 점점 다가올 때 마다 커져가는 성종이의 심장소리는 터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거세게 뛰고 있었다. "한다." "ㅁ,뭘.." "한다고." 우현의 입술이 성종의 입에 퍼즐 피스마냥 맞물리고 두근거리는 심장소리에 성종은 질끈 눈을 감았다. 따듯하고 떨려. 성종의 머릿속에는 이 단어들이 팔랑팔랑 날라다녔다. 그리고 저의 허리를 감싼 우현의 팔을 느끼며 성종도 제 팔을 뻗어 우현의 목에 자연스럽게 둘렀다. "…사람 아픈데 너희 여기서 뭐하냐." 축축 쳐지는 몸을 이끌고 화장실을 가려던 성열은 부엌에서 진하게 입술을 맞대고 있는 성종과 우현을 보며 말했다. 놀란 두 사람은 파드득 떨어졌고, 그게 또 어이가 없었는지 성열은 피식 웃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그, 그게 형! 형 아파서 내가 죽을 끓이려는데… 그거를 또 내가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그래서 얘가 와서…." "성종이가 너 준다고 죽 끓일거래. 죽 끓이는 법 모르겠다고 나 불렀고." 화장실 불을 켜려다 우현이 하는 말에 두 사람을 흘끗 돌아본 성열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이 상황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성열을 보며 성종을 손톱을 깨물었다. 그 모습을 본 우현이 가만히 성종의 손을 끌어 내렸고, 성열은 고개를 젖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남우현." "뭐." "너 성종이 많이 사랑하냐?"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대답이나 해, 새끼야." "당연하지." "……." "존나게 사랑하는 데 왜. 뭐, 불만이라도 있어?" 우현다운 거친 표현에 또 피식. 대답하는 우현을 사랑해 마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성종에 또 피식. 성열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성종이가 싫다고 해도 미친듯이 사랑해 주길 바라." "……." "남우현, 너한테 우리 성종이를 맡기겠다는 거야." * * * "호원아!" "어? 형?" 호원의 집 앞에 서있는 동우를 보며 호원은 제가 시간을 잘못 본건지 손목에 채워진 손목시계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6시 30분. 아직 동우는 쿨쿨 잠을 자고 있을 시간인데 이렇게 제 집앞에 교복까지 말끔하게 차려입고 서 있는 걸 보니, 저 사람은 동우가 아닌 건가 싶기도 했다. "형? 왜 여기 있어요?" "오늘은 내가 호원이 데리러 왔지!" "형이요?" "응! 매일 매일 호원이가 나 데리러 오니까 미안해서…." 뒷머리를 긁적이며 얼굴을 붉히는 동우에 호원은 그를 와락 끌어안고는 머리에 코를 묻었다. 가슴 가득 느껴지는 동우의 향기에 호원은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환히 미소지었다. 형, 어떡해요. 나 형이 너무 좋아서 미쳐버릴거 같아. 아침부터 세차게 뛰는 가슴에 호원은 동우를 더욱 끌어 안았다. "으윽, 호원아? 나 숨 막혀." "그럼 숨 쉬지 마요." "으엑, 정말 숨막혀!" "뽀뽀 해주면 풀어 줄게요." "…뽀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는 동우. 그런 그를 보며 호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우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주위를 살피더니 눈을 질끈 감고는 호원의 양 볼을 잡았다. 쪽.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에도 귀 끝까지 빨갛게 물든 동우를 보며 호원은 그의 뒷목을 잡고 방금 전보다는 조금 더 진하게 입술을 빨아 들였다. "여긴 밖이야, 호원아!" "뭐 어때요. 내가 좋아서 죽겠는데."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호원을 보며 동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못말린다니까 진짜… 결국 동우는 못 이기는 척 하면서 호원을 받아들였다. * * * 성종의 지극정성 덕분인지 성열의 감기는 거의 하루만에 다 낫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등교길에 오르는 두 형제의 손은 꼭 잡은 채였다. 교문 앞에서 이 둘을 본 우현은 바로 똥씹은 표정을 하면서 성종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야!" "이게, 서방님 손을 잡아야지." "형이잖아!!" "형이고 나발이고…." 내 눈에 이성열이 단순히 형으로만 보이겠냐? 우현의 반박에 성종은 울상을 하면서 성열을 바라봤고, 성열은 그만 가보라며 손짓했다. 성종은 마지못해 성열과 잡고 있던 손을 떼고 우현에게 끌려가다시피 했고, 성열은 비어버린 손을 쓸쓸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호원과 동우였다. 둘은 여전히 다정해 보이네. 성열이 입가에 슬쩍 미소를 걸었다. 성열을 먼저 발견한 동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서, 성열이네? 안녕?" "안녕하세요." "성종이는?" "먼저 들어갔다, 짜식아." 호원의 물음에 자기 짝이랑, 이라는 말은 목구멍 아래로 삼켜낸 뒤에 성열은 그 둘과 함께 정문을 통과했다. * * * "너, 어디서 지내?" 아침조례를 마친 뒤 성종이 우현을 데리고 운동장에 있는 벤치에 앉힌 뒤 걱정스레 물어보자 우현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설마 진짜 찜질방 같은 데서 자고 온 건가? 성종의 눈동자가 빤히 저를 주시하자 우현은 얼굴을 붉혔다. "얼굴만 붉히지 말고 대답을 해!" "…지내는 데 있어." "진짜? 어디? 어딘데?!" "…김성규 선생님." 예상을 벗어난 우현의 대답에 성종은 눈을 크게 뜨면서 놀란 기색을 했다. 기, 김성규 선생님 집에서 머문다고?! 어떻게?! "어, 어떻게?" "그날 연락이 왔어, 좀 만나자고. 그래서 만났지. 아버지 없이 어떻게 지낼 거냐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했어, 집에서 쫓겨났다고. 방세가 밀려서. 그러니까 엄청 당황하더라. 내 말 듣고 계속 생각하다가 얘길 꺼내더라고, 자기 집으로 들어오라고, 동거인의 허락을 받긴 해야 되지만 내 사정이 우선이라나 뭐라나…." "도, 동거인이 누군데?" 진짜, 들으면 너도 깜짝 놀랄거다. 나도 놀랐으니까. 우현이 운을 떼면서 대답했다. "김명수." "…뭐?!" "김명수라고, 김성규 동거인이." 그날 성규를 따라 집으로 들어간 우현은 이전과는 확연이 달라진 환경에 조금 당황했다. 이사했냐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교사 일을 그만뒀으니 넉넉치 않은 수입으로 그 오피스텔을 관리할 수가 없다고. 짐을 풀고 시간이 조금 지났을까, 현관문을 열고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명수였다. 서로 놀라면서 손가락질을 했고, 성규는 명수에게 이런저런 사정을 얘기하면서 양해를 구했다. 명수는 마지못해 승락했으나 눈빛은 여전히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현은 지레짐작으로 두 사람의 사이를 알 수 있었다. "학교 자퇴하고 일하나봐. 얼굴이 많이 거칠어졌더라고. 김명수." "전교 일등이 일이라니. 상상이 안간다." "근데 얼굴은 행복해 보였어. 내가 보기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니 얼굴이 펼 수 밖에 없지. 우현의 중얼거림에 괜히 멋쩍은 성종은 우현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성종의 머리를 헝클고 품으로 끌어당긴 우현은 머리 위로 가볍게 입술을 내리 눌렀다. 성종아. 달콤하게도 부르는 우현의 목소리에 살짝 고개를 든 성종. 그리고 재빨리 와 부딪치는 우현의 입술. "후으, 진짜 남우현 종잡을 수가 없어." "그래도 좋지." "아니." "뭐?" "죽겠어, 너 때문에." 장난스럽게 코를 찡긋거리는 성종을 보며 우현은 실없이 웃었고, 그런 그를 밉지 않게 노려본 성종은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물었다. "거기서 지내는 거 불편하지 않겠어?" "나야 그냥 잠만 자는 거니까." "잠만?" "응. 하루 종일 네 옆에 이렇게 붙어 있을 건데. 그럼 거기서 잠만 자면 되지, 내가 뭘 바래?" "……." "그 사람들 깨떨어지는 거 볼바에는 그냥 잠만 자는게 나아. 내 애인 버젓이 이렇게 두고 혼자 외로울 수는 없잖아." 포옥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우현. 성종은 그런 그를 보며 와하하 하고 웃어버렸다. 꼬리가 달려있다면 귀가 축 쳐진 강아지와 꼭 닮았을 것 같은 귀여운 모습이었다. 학교 대표 사고뭉치 남우현이 이렇게 귀여운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면 믿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우현의 목을 와락 끌어안은 성종은 얼굴 가득 미소지으며 나즈막하게 속삭였다. "너무 좋다." "머? 안들린다, 이년아." "남우현 너무 좋다고." "뭐래. 갑자기 서방님이 왜 좋대? 심장 터지게." "너무 좋아서 계속 함께 있고 싶어." "……." "너도 그렇겠지?" 설레는 목소리에 우현은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성종의 등을 끌어안았다. 마르고 작은 몸이 품안에 쏙 들어오고 서로에게 맞춰진 듯 잘 맞물린 저들을 보며 조금 더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푸르른 하늘 아래 사랑만이 가득할 그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 * * * "명수야, 화났어?" 나가기 전, 성규는 슬쩍 명수를 보면서 말을 건넸다. 저와 별다른 상의 없이 우현을 집에 들인 것 때문에 명수가 조금 골이 나있는 듯해서 성규는 괜히 안절부절했다. 하지만 우현의 사정이 극으로 치달았다는 걸 알았을 때는 정말 앞뒤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대로 우현을 길바닥 신세를 지게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우현이 사정이 너무 딱해서 그랬어, 그러니까 명수 너도 그만…." "내가 화난 건 남우현을 집에 들여서가 아니에요." "그, 그럼?" "나랑 한마디 상의라도 했어야죠. 자기 멋대로 결정한 건 좀 너무했잖아요. 내가 어려서 그런 거에요?" 명수의 말에 성규는 손사래를 치면서 부정했다. "아니야! 절대 그런 거 아니야!! 너 무시해서 그런 거 아니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마라, 응?" 애원하는 눈빛으로 말하는 모습에 명수는 금세 화가 풀려버렸다. 피식, 하고 웃는 모습에 성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조금 화나요, 우리 둘만의 공간에 제3자가 들어왔다는게." "좀 봐주라, 응? 아버님 돌아가시고 지내던 곳에서 쫓겨났는데 그대로 냅뒀다간 길바닥 신세가 될게 뻔해서…." "알았어요, 이제 그거 가지고 뭐라 안 할게요." 하지만 학교에서도 몇 번 마주친 적이 없었던 얼굴을 매일 봐야 하는 사실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거구나. 명수는 소파에서 일어나 현관에 서 있는 성규에게 다가가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면서 얘기했다. "잘 갔다와요." "으, 응." 성규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든다. 명수는 씩 웃으면서 성규를 현관문 밖으로 떠밀었다. * * * "야 이호원,빵 좀 사와" "지랄하네,내가 왜?" "동우 형이 먹고싶다잖아,빨리 안 사와?" 동우는 내가 언제? 하는 눈빛으로 성열을 쳐다봤고 성열은 조금 조급하다는 듯이 호원을 보챘다. 얼른 갔다오란 말야, 이 자식아. 성열의 닥달에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난 호원이 투덜거리며 매점으로 향했고 교실 문이 닫히자마자 성열은 팔짱을 낀 채로 시선을 들어 자신의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동우와 눈을 똑바로 맞추었다. 아침 이후로 동우와 말도 하지 않던 성열의 입이 열리고 성열의 입에서 나온 말은, "동우형 나 불편해요?" " 아.. 아니, 저..전혀. " 성열의 물음에 동우는 말을 더듬으며 답했고 성열은 후,하고 얕은 한숨을 쉬었다. 이 형 지금 나 엄청 어색해하고 있구나, 하고 절실히 느낄 정도로 동우는 지금 충분히 저를 불편해하고 있는데 도데체 뭐가 아니란걸까. 누가 보아도 명백히 자신을 어색해하는 것이 확실한 동우의 행동에 성열이 동우의 얼굴에서 시선을 내리고 힘없이 웃었다. "형이 계속 제 눈치보니까 덩달아 나까지 우울해지잖아요,혹시 저한테 미안해서 그래요?" "아,아니, 뭐…." "미안해할것 없어요. 동우 형은 진짜 착해빠져서 문제야. 요즘 세상에 누가 자기 애인 짝사랑하는 사람을 걱정해줘요?" 그런 사람, 이 세상에 형밖에 없을껄요. 이해가 안간다는듯한 성열의 말투에 동우가 멍청하게 웃어 보였다. 물론 그렇긴 하지만 성열을 마음 편히 대한다는게 어찌 그리 쉬운일일까, 성열의 앞에만 있으면 괜히 호원과의 스킨쉽 이라든가 대화자체가 확연히 줄어들었다는 것을 느꼇다. 그것은 분명히 성열을 의식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성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이런 저런 생각에 빠진 동우를 보며 성열은 자신이 말해놓고도 민망했는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냥 예전처럼 편하게 대해줘요.이젠 나를 위해서라도 이호원 좋아하는 마음 접을거고 그리고 이렇게 계속 불편하게 지내기엔…." 말을 끊은 성열은 가볍게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호원의 대한 제 마음을 접었으니 모든게 끝났다. 제가 마음을 접으니 모두가 이렇게 행복해지는데 그걸 왜 이제서야 깨달은건지 속으로 무식한 제 머리를 탓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동우 형은 무지무지 좋은 사람이니까." 성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빵 사왔다, 라고 크게 소리치며 교실문을 열고 들어오는 호원을 보며 그제서야 둘은 슬몃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쩐지 이제 정말로 행복해질것같은 조금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으며. * * * 하아. 두준의 입에서 하얀 연기가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상처받은 눈을 하고 저를 쳐다보던 성규의 모습이 눈에 지워지지 않고 자꾸만 저를 괴롭히는 것이 괴로워 잠시 끊었던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투명한 연기가 제 눈을 가렸다. 또 다시 눈물을 흘리며 저에게 소리를 지르는 성규가 떠올랐다. 매운 연기에 속이 쓰린다 생각한 두준은 이내 제 손 안에 있던 담배를 바닥에 던져 제 구둣발로 지긋이 문질렀다. "김성규." 듣고있나. 아, 김명수 그 자식이랑 같이 있겠구나. 그러면 못 듣겠지? 시덥지않은 생각에 웃음이 자꾸 나오려한다. "성규야." 마지막으로 다정하게 네 이름을 부를테니 이해해줘. 몇일 전 억지로 성규를 되찾으려 한 저의 행동이 틀렸다는 것을 흔들리는 성규의 눈동자를 보고 깨달았다. 목 놓아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을 외치는 그의 모습은 낯설었다. 너무나도 낯설어서 제 심장을 멎게할 정도로. 또 다시 선명해지는 그 날의 기억에 두준은 깊은 숨을 뱉었다. '왜 그랬어' 라고 묻는다면 그저 '널 되찾기 위해' 라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그렇다고 후회를 느끼진 않는다. 어짜피 이미 그는 내게 떠났다란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나의 마지막 몸부림이였고 항상 어렸을 때 부터 그래왔듯이 나의 것이라 여긴 사람이라 나만이 소유할 수 있었다 생각 했으니까. 두준이 마른세수를 했다. '진짜 갈 데까지 갔구나, 윤두준. 니가 이런다고 내가 너한테 다시 돌아올 것 같아? 웃기지마, 난 절대… 너한테 안 돌아가.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나를 놔줘.'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제게 뱉은 말들이 귓가를 맴돌았다. 심장이 찢어질 것 같다. 성규야, 김성규. 난 널 놓아야 하는게 맞는 걸까. 이렇게 널 포기하는게 네게 내가 남길 수 있는 마지막 멋진 윤두준의 모습이겠지. 그렇다면 성규야, 널 위해 내가 너의 손을 놓을께. 두준은 제 네번째 손가락에 끼여진 제 빛을 뽐내는 반지를 바라봤다. 난 이렇게 슬픈데, 그와 추억을 함께한 이것은 너무 빛이 난다. "안녕." 그리고 곧 이어 더 이상 제 손가락에 위치하지 않은 반지를 던졌다. 이 반지와 함께 김성규란 사람도 내게서 멀어지는 것이다. 이 것이 옛 연인인 윤두준이 네게 해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등을 돌린 두준의 어깨가 조금은 더 성숙해졌다면 착각일까. "더 좋은 인연을 위해, 피스." 낮은 두준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사람의 온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제 생명을 다한 담배 한 개피와 빛을 뽐내는 반지 뿐이 제 자리를 지켰다. * * * 비밀 번호를 입력한 뒤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신발을 벗던 우현은 평소와는 다른 집안 공기를 느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거실로 발을 들이려니 아주 제대로 못볼꼴을 보고야 말았다. 쇼파에 사이 좋게 달라 붙어 앉아 진득한 키스를 나누고 있는 성규와 명수의 모습. 눈가를 찌푸리던 우현은 괜한 심술이 밀려왔고 일부로 발소리를 쿵쿵 내며 성규와 명수의 앞을 지나쳐갔다, 우현을 발견한 성규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급히 명수의 몸을 밀쳐냈고 급히 밀려오는 민망함에 차마 우현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명수는 아쉬운 표정을 해보이며 우현을 원망의 눈초리로 노려 보았다. 우현은 주머니에 손을 꽃고 건들건들 거리며 성규를 향해 입을 열었다. " 선생님, 얹혀 사는 주제에 이런말 할 자격 없다는거 잘 아는데, 그래도 그런건 방에 들어가서 하시…. " " 이런말 할 자격 없는거 알면 조용 하고 있던가. " 명수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우현의 말을 딱 잘랐다. 새끼야, 내가 너한테 말했냐? 우현이 표정을 구기며 명수를 위협했고 명수는 그런 우현을 비웃기 시작했다. 어쭈, 너 지금 비웃었어? 너 뒤질래? 명수의 태도에 잔뜩 심기가 거슬린 우현이 주먹을 쥐고 금방이라도 명수에게 달려갈듯한 태세를 취했다. 명수는 피식, 웃으며 쇼파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 너 지금 선배한테 덤비는거냐? " " 뭐, 선배? 나 1년 꿇은거 모르냐? 너랑 갑이거든? " " 1년 꿇은게 뭐 자랑이라고. " " 뭐.. 뭐라고? 너 뒤질래?! " 결국엔 참다 못한 우현이 명수에게 달려 들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명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채 여유로운 표정을 해 보이며 방어 태세를 취했다. " 썅, 그만 두지 못해?! " 상황을 지켜보던 성규가 결국엔 욕과 함께 괴성을 내질렀다. 예상치 못한 성규의 반응에 주먹 다짐을 하려던 우현과 명수가 놀란 얼굴로 행동을 멈춰섰다. 성규가 표정을 잔뜩 구긴채 그런 둘에게 다가가 둘 사이를 떼어났다. " 김명수,남우현. 니들 선생님 앞에서 뭐하는짓들이야! 내가 이제 선생으로 안 보인다 이거야? 너희들 내 별명이 미친개인거 잊었어? 오늘 미친개의 진면목을 보여주겠어. 당장 밖으로 기어나와. 1분 준다. " 성규는 그 말과 함께 먼저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보는 성규의 미친개 모드에 우현과 명수는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병신아, 너 때문에 성규형 화났잖아. 명수가 제 말만 툭 내뱉고 집을 나섰고, 우현은 그런 명수를 붙잡고 주먹을 날리려다 애써 화를 가라 앉혔다. 동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공원에서 성규의 걸음이 멈춰섰고 자연스레 우현과 명수의 걸음도 멈춰섰다. " 어깨동무 하고 앉았다 일어났다 백번 실시. " 성규의 말에 우현의 입이 쩍 벌어졌다. 장난쳐요? 우현은 기가차다는듯 벌벌 뛰기 시작했다. 항상 어른스럽던 명수의 표정도 좋지 못했다. 난 잘못한거 없는데, 왜 나까지 해야 하는거지? 명수는 제 좋은 머리로도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 어깨동무 안해? 빨리 한다 실시! 구호는 앉으면서 싸우지 말고, 일어나면서 사이좋게! " 헐, 존나 오글거려!! 우현이 정색을 빨면서 소리치자 성규가 바로 매서운 눈으로 우현을 노려봤고, 명수는 혀를 차면서도 성규 바라기 답게 성규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마지못해 우현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에 우현 또한 한숨을 푹 내쉬면서 덩달아 명수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리고 성규가 외치는 구호에 따라 덜떠름한 표정으로 따라 외치기 시작했다. "싸우지 말고!" "…싸우지 말고." "크게 안하지? 이 동네가 울리도록!! 사이좋게!!" "…사이좋게!!" "싸우지 말고!"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사이좋게!!!" 그렇게 몇십 분이 지나고 나서야 성규는 이제 그만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자 명수와 우현은 거의 동시에 공원 바닥에 널브러지듯이 대자로 뻗어버렸다. 으으,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어. 둘이 헉헉 거리면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걸 쳐다보던 성규는 이내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니네, 한번만 더 싸우려고 하기만 해봐! 그땐 진짜 이것보다 더한 지옥을 보여줄 테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애인한테까지 이러는 건 너무 심하지 않아요?" "넌 내 애인이기 이전에 제자다." "…선생님, 나 못 일어나겠어요." 명수와 성규의 대화를 지켜보던 우현이 드러누운 채로 볼멘소리를 하자, 명수를 부축하던 성규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계속 거기에 드러누워서 자던가." "아 진짜!! 얹혀사는 것도 서러운데 이렇게 찬밥신세로 대하시면 안되죠!! 이럴거면 왜 들어오라고 한거에요!!" "얼른 일어나! 내일 학교가는 놈이 계속 거기서 엄살필 거야?!" "…썅, 누군 애인 없어서 이러는 줄 아나." 결국 우현은 잔뜩 인상을 구기면서 없는 힘을 주어 바닥에서 일어났고, 어기적 어기적 거리는 걸음으로 성규를 따라갔다. 내일 일어나면 다리에 알 배기겠다. 벌써부터 내일 일어날 일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흐윽, 성종아. 니 서방님 이렇게 구박데기로 산다. 성종이 더욱 더 그리워지는 밤이었다. * * *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엿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1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동우가 서울에서 최고로 으뜸가는 대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 때문에 3학년이 된 호원만 죽어라 고생을 하게 되었다. 호원은 동우와 같은 대학에 입학해 캠퍼스 커플의 로망을 만끽 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담 쌓고 살았던 공부라는것을 시작했다. 3학년에도 호원과 같은 반이 된 성열은 그런 호원을 보고 장족의 발전이라며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성열은 호원의 대한 마음을 일제히 접었다. 처음에는 많이 힘들어 했던 성열이었지만,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제 마음속에서 호원을 완전히 정리했고 예전과 같은 둘도 없는 단짝으로 남게 되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아픔이 지나간 자리에 새로운 인연도 찾아왔다. 외로워하는 성열을 보며 동우가 제 대학 선배를 성열에게 소개 시켜 주었고 둘은 좋은 인연을 만들어 나가는 중이었다. 남자의 이름은 강동원. 성열보다 키도 컸고 외모 또한 빼어났다. 모든 여성들의 이목을 집중 시키는 일명 미친 비쥬얼 커플의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명수는 검정고시를 통해 고등학교 졸업장을 땄고 현재는 올해 치를 수능 준비에 열중 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장만 따고 곧바로 취업을 하려던 명수 였지만, 명수의 좋은 머리를 도저히 썩혀 둘 수 없었던 성규가 명수를 설득 시켰다. 내가 너 먹여 살릴테니까 걱정말고 공부해서 대학에 가. 라는 포스 넘치는 말에, 명수는 성규 혼자 힘들게 생계를 꾸려 나가는 모습이 안타까웠지만서도 제 마음을 다 잡을수 있었다. 성규는 제 전공을 살려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제 이름을 건 피아노 학원을 차려 학생들을 가르치겠다는 소박하면서도 큰 꿈을 안고서 말이다. 성규의 노래 실력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라이브 카페는 성규를 보고 위한 사람들로 나날이 붐비었다. 성규로 인해 카페의 수입이 올라간 만큼, 성규의 월급도 올라갔고 명수와 먹고 살만한 걱정은 덜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큰 변화를 겪었다고 볼 수 있는건 우현이었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우현의 앞으로 사망 보험금이 들어왔다. 어마어마한 액수에 놀란것도 잠시, 우현은 아버지의 친구 되는 남자에게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공사장에서 발을 헛디뎌 추락사를 한 줄로만 알았던 제 아버지가 실은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남자의 말에 의하면, 사고가 터지기 전 날밤. 우현의 아버지는 남자와 술을 마시며 부모를 잘못 만나 고생하는 우현의 이야기를 꺼냈고, 눈물로 술잔을 비웠다고 한다. 그리고 제가 죽으면 우현에게로 사망 보험금이 나올테니 이것이 제가 아비로써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될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남자는 우현의 아버지가 술에 취해 우스겟소리로 한 얘기인줄 알았는데 그 다음날 공사장에서 그렇게 자살을 할 줄은 몰랐다며 유감을 표시해 왔다. 그 사실에 우현은 한참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제 통장으로 들어온 어마한 액수의 사망 보험금을 보며 오열을 하기 시작했고, 울다 지쳐 결국엔 실신까지 하고야 말았다. 이 일이 우현에게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그 날 이후로 우현은 딴 사람이 되었다. 항상 건들건들 거리며 폭력적이고 욕을 입에 담고 살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매사에 진지해지고 언행도 온순해졌다. 학교도 착실하게 다녔고 그동안 신세를 지던 성규의 집에서 나와 사망 보험금으로 작은 월세방을 하나 구했다. 방을 구하고도 몇년동안은 먹고 놀아도 될 만한 큰 돈이 남았었지만 우현은 알바를 두 세개씩 뛰기 시작하며 스스로 돈을 벌었다. 성종은 그런 우현의 모습을 보며 엄지를 치켜 들었고 새삼 다시 한 번 우현에게 반하게 되었다. 성종은 외박을 하는 날이 잦아졌다. 주말에는 꼭 우현의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도 말이다. 우현과 성종은 사이 좋게 달라 붙어 앉아 티비를 시청하고 있었다. 요즘 한참 재밌게 보고 있는 서열왕이라는 예능 프로를 보며 성종은 큰 소리로 웃어 재꼈다. 그러나 우현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보였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성종의 얼굴만을 빼꼼히 쳐다 볼 뿐이었다. 그 시선을 느낀 성종이 고개를 돌려 우현을 쳐다 보았다. " 뭐, 할말이라도 있어? " " 어, 있어…." 성종의 물음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 거리며 어, 라고 대답한 우현. 성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현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 너 왜 나 형이라고 안 불러? 학년은 같아도 내가 너보다 한 살 더 많은거 알잖냐. 이성열이랑 나랑 동갑이거든? 이성열한테는 형이라 부르면서 나한테는 말 놓는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 쉴새없이 말을 쏟아내는 우현을 보며 성종은 멍한 표정을 해보였다. 지금껏 아무말 없이 잘 지내오다가 새삼스레 왜 이래? 성종이 툴툴 거리며 말을 내뱉었고, 우현은 잔뜩 인상을 구겼다. 앞으로 형이라고 불러, 이건 부탁이 아니라 경고야. 우현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험상궃은 표정을 해보이며 입을 열었다. 성종은 그런 우현의 행동에도 아랑곳 않고 흥, 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 그런 표정 지어봤자 하나도 안 무섭거든? " " 아오, 진짜 형이라고 부르라고 이년아!! 응? 부탁이야. " 우현이 이번에는 작전을 바꿔 애교를 부리며 강아지처럼 성종에게 앵겨 들었다. 성종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싸 안으며 큰 덩치로 성종의 가슴팍에 얼굴을 부비적 거렸다. 강아지 같은 우현의 모습에 성종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 내가 남우현 너 때문에 못살아. 형, 우현이형. 이제 만족해? " 성종의 말에 우현의 얼굴에 금새 화색이 돌았다. 그와 동시에 씨익, 웃은 우현이 몸에 무게를 실어 그대로 성종을 바닥으로 깔아 눕혔다. 코 앞에 닿은 우현의 얼굴. 갑작스런 우현의 행동에 성종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 올랐다. 뭐, 뭐야! 안떨어져?! 당황한 성종이 말까지 더듬으며 우현을 밀쳐내려 했고, 우현은 그대로 성종에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맞물리고 달콤한 키스가 이어졌다. 얼마지나지 않아 달달하게 맞물려 있던 입술이 떨어지고, 성종은 숨을 고르며 내심 아쉬운 표정을 해보였다. 그런 성종의 마음을 읽은 우현이 픽, 웃음을 터뜨렸고 능구렁이처럼 구는 우현의 모습이 성종은 그렇게 얄궃게 보일 수가 없었다. 성종이 뾰루퉁한 표정을 한 채 우현의 얼굴을 감싸 안으며 입을 열었다. " 너.. 아니, 형. 나 좋아하는거 맞아? " " 아니. " 우현의 입에서 나온 예상치못한 말에 성종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성종은 눈물이 터져나올것 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그런 성종의 귓가에 우현이 달콤하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안 좋아해. 그 대신 사랑해, 라고…. * * *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성장통을 겪는다. 성장통을 앓으며 나이를 먹고 성숙해져간다. 거침없이 돌아가는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성장통에 아파 하고 있다. 이 성장통의 끝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그것은 성장통 이였다, 라고 우스겟 소리로 웃어 넘길 수 있을 때가 된다면, 그 때가 바로 날 괴롭혀왔던 성장통의 끝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우리의 성장통, 우리는 성장통의 끝을 향해 앞으로도 열심히 달려 나갈 것이다. 인픽 오월 주제 릴레이, 성장통. 完.